작가명 : 고갱(Paul Gauguin) 활동년도 : 1848~1903 작가소개 :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1876년경으로 마네, 르느와르, 모네, 피사로, 세잔느의 작품을 사 모으면서 시작된 미술에 대한 관심은 곧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35세 때, 본격적으로 미술에 전념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기에 이르러 실업가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가족과도 결별하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많은 모순들이 유럽의 문화속에서 인간의 가장 귀중한 능력, 즉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앗아가버렸다는 고갱의 확신은 '양식'이나 '단순한 기교'를 넘어선 인간의 열정처럼 힘차고 강렬한 그 어떤 것을 찾아 나선다. 처음에 고갱은 프랑스 서부 브리타뉴 지방의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며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는 신앙심에 관한 그림은 그릴 수 있었지만, 신앙에 의해 그릴 수 없는 한계를 넘기 위해 2년후, 그곳을 떠나 문명에 때묻지 않은 생활을 찾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의 그림은 어떤 의미에선 단순화하고 넓은 색면에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며 토착민들의 순수함과 솔직함을 담아냈다.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고갱은 야성적인 색체와 이국적인 표현기법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원시적 감성을 찾아 타히티로 떠난 이래, 그곳에서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6년여 걸쳐 완성했으며, 최후까지 붓을 놓지 않으면서 고독과 우울속에서 만년을 보냈다. 고갱의 맹렬한 독립성과 서구 미술의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원칙의 거부는 무명 젊은 시절에 미술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폴 고갱은 프랑스인과 페루인의 혼열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계는 폭력, 강간, 급사, 급진주의 지식인 등의 기며한 혈통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는 유년기를 페루와 프랑스에서 보낸 후, 6년간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고, 1871년에서 1882년까지는 증권 브로커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인상주의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시험삼아 그림을 그려봤으며 1879년에는 그가 만든 조그마한 조각상이 인상주의전에서 받아들여지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그 다음 해에는 7점의 그림들을 전시했다. 1883년에 이르러, 그는 직장을 버리고 전적으로 미술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미 그때 인상주의의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1886년에서 1891년 사이에, 그는 브로타뉴의 퐁타벤에 모인 미술가 그룹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888년에는 아를르에서 반 고흐와 두 달간을 함께 지내기도 한다. 이 시기는 고갱이 끊임없이 그 자신과 자신의 미술에 의문을 제기했던 시기였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증폭되었던 시기였다. 부유하게 지내다 갑자기 지독한 가난에 빠지고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지게 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커다란 슬픔이었다. 그가 "우연성의 요구에 발목을 잡혔었다."고 회상하는 인상주의를 거부한 뒤. 그의 목표를 처음으로 충분히 실현시킨 작품은 1888년 [설교후의 환영]이다. 이 작품은 마치 교회에서처럼 침묵에 잠겨 기도하고 있는 브르통의 농촌 아낙네들이, 금빛과 찬란한 푸른색에 감싸인 날개 달린 천사와 야곱이 불타오르는 붉은 벌판에서 씨름하고 있는 것을 환영 속에서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전통적인 원근법에 따라 구성되긴 하였지만, 도식적인 구성, 이어지면서 그림자 없는 색면, 실루엣의 사용등은 일본 판화의 영향이 분명하고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고갱의 미술은 분석적 관찰보다는 상상적 개념의 미술이다. "예술은 하나의 추상이다."라고 말한 그는 아를르에 있는 반 고흐를 위해 그린 자신의 [자화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그림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절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얼핏 보면 그 것은 산적의 얼굴처럼 보이며.... 인정 받지 못한 인상주의 화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갱은 이 초상화를 보내면서 빅토르 위고의 낭만주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천재성은 놀라울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발휘되었다. 1889년경부터, 그는 초기의 관심사였던 조각에 눈을 돌렸다. 1889년에서 1890년 사에에 제작된 부조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는 매우 비자연주의적인 작품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이상한 작품"이라고 여겼다. 거칠게 깎여진 형태들의 의미는 수수께끼처럼 모호하나 대단한 물리적 밀도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고갱의 정신과 손은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지팡이를 깎기도 했으며, 도자기를 구워 보기도 했다. 그의 목판화와 아연 판화는 열정에 넘치며, 이런 판화에서 시도한 왜곡된 형태들은 재료의 가능성을 느끼면서 만들어낸 것으로 목판화의 생명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갱의 회화로는 타히티 시대 작품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말할나위 없이 신비스럽고 꿈 같은 주제, 즉 무르익은 원시의 땅이라는 도피처를 제공한 때문이다. 그러나 태평양은 그에게 새로운 주제를 제공하기는 하였어도, 그 주제들을 표현해 낼 형태언어의 폭까지 넓혀 주지는 않았다. 1897년 후반 자살미수 전에 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그린 유명하고 거대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는 그가 정신적 유연장이라고 생각하고 그린 그림이었다. 그것은 사실 가장 야심적으로 모든 것을 종합해 넣은 작품으로, 수수께끼 우상뿐 아니라 그가 이미 그의 초기 구성들에서 사용했던 상징적인 형태들 대부분을 끌어모아 신비스러운 파노라마로 엮은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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