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음악과 글

애송시58편-장석남/수묵 정원9-번짐

달빛그림자 2008. 11. 18. 19:33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 일러스트=잠산

번짐이라니. 바뀜이 아니라 번짐이라니. 목련꽃이 피는 일을,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절의 순환을, 너와 나 사이 사랑과 이별의 사건을,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그 둥?을, 시간과 공간의 옮김을 번짐이라고 부르다니. 먹물이 화선지에서 고요하게 번지듯이. 그리하여 번짐은 환함이라니. 씨나 날로 결어서 천을 짜듯이 조촘조촘 가는 것이라니.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나아가는 것이라니. 번짐이라고 부르면 나와 당신은 얼마나 가까운가. 이 생(生)을 받아 가꾸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가.


장석남(43) 시인의 시는 강한 전염력을 갖고 있다. 그의 시는 '번지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나아간다. 밀어내고 부드럽게 떠나고 밀려들어오는, 그 '어쩌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우리들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을 아주 잘 들여다보고 귀담아듣는 출중한 감각을 자랑한다.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라고 쓴다거나,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아, 저 혓자국!"('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이라고 쓸 때의 놀라운 감각이라니!


장석남 시인의 마음에는 '옹근 고요'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옹근 고요 위에서 그의 시는 태어난다. 고독과 외면과 섭섭함과 흔들림과 설움과 간신히 잦아드는 것과 사소함과 곰곰 궁금함과 은밀함과 찬란함과 되비쳐옴과…… 그 모든 감정의 섬세한 자세를 그의 시는 그려낸다. '겨우'라고 수식될 세상 살림들의 속삭임과 혈육인 듯 함께 살면서 '물항아리에 물 차 오르면 거기에 어룽대는 물의 빛'과도 같은, 사람의 가슴에 도는 생(生)의 윤기를 발견해낸다. (삶에 윤기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시에도 자원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시법(詩法)')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 시대에 아주 드문 서정시인이다.


첫 시집을 내고 "나는 춤꾼이거나 가수이거나 아니면 유능한 세션맨이 되었어야 옳았다"고 고백하는, 해서 한때는 전기기타를 배우러 사설강습소를 다녔다는, 해서 한때는 배우로도 활동한, 거문고를 안고 사치를 부리기도 한다는 시인. 장석남 시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확신하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시인은 울림통 하나쯤은 지닌 근사한 악기여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