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것들 / 류시화
여기에 둥근 기둥이 있어 아무도 그것을 둘러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흙 위에 솟아나온 뿌리가 있어 그것은 방향 없는 눈 아무것도 아닌 것
발에 채인다 여기 모든 흐름을 멈추게 하는 것 빛을 갉아먹는 황금색 벌레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
새삼 사랑을 공개할 필요는 없으리라 눈 위에 눈 위의 감시자들에게 새삼 나의 애인을 들추어 낼 까닭은 없다 여기 하늘에서는 조용히 구름이 날고 이미 이전에 왔던 이가 또 소리친다 이제 곧 종말이 오리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있음을 안다 눈 속의 감자들, 감자의 죽은 눈들
우리는 소리 없이, 줄지어 검은 나무들 아래로 지나간다 안개, 기둥들, 들리지 않는 소리들 한때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것들,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여기에 멈추지 않는 흐름이 있어 우리와 함께 지나간다 소리지른다, 언제나 들리는 소리들 여기에 우리가 서 있어 아무도 우리를 구속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여기에 찬란한 기둥들이 서 있어 아무것도 우리의 찬양을 받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 - j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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