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음악과 글

애송시85-이장욱/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달빛그림자 2008. 11. 17. 23:01



[애송시 100편-제 85편]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 일러스트=권신아

이장욱(40) 시인의 시는 몽롱하다 아니 명쾌하다. 난해하다 아니 낯설다. 좀 다르게 말해보자. 그는 낮을 사는 시인이다 아니 밤을 사는 시인이다. 그는 시인이다 아니 소설가다. 노문학자다 아니 (픽션)에세이스트다 아니 비평가다. 현대시 모더니티의 한 극점에 서 있는 '우울한 모던보이'다, 아니 서정시의 안부(內部)를 공략하는 '진정한 인파이터'다. 짐작하겠지만, 그는 그 모두이면서 단지 문학 그 자체이다. 이 시의 묘미도 이런 어울림에 있다. 대화와 독백, 여기저기서 끌어온 문장들의 인용과 변용, 절망을 농담으로 받아치는 경쾌함, 뜬금 없고 돌연한 조증(躁症)과 울증(鬱症)의 변주, 비극적이면서 냉소적인 다변(多辯)으로 날렵하게 치고 빠지는 잽이 장기인 시이다.


파이터!라는 말은 자극적이다. 인파이터! 라고 듣는 순간 단전에서부터 전의(戰意)가 꿈틀거린다면 당신은 사각의 링 위에서 난투극을 벌여본 적이 있거나 벌이고 있는 자다. 외곽을 돌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아웃파이터이거나 상대에게 바짝 달라붙어 저돌적인 공격을 퍼붓는 인파이터일 것이다. 1982년 겨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파이터 맨시니의 강펀치를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복서 김득구, 그 경기에서 김득구는 분명 맨시니보다 더 인파이터였다. 그러나 김득구는 오는 펀치를 피해 되받아치는 카운터 펀치, 그 한 방의 나이스 펀치를 날리지 못했다.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코끼리〉). 김득구는 그렇게 무너졌다. 가출해 구두닦이를 전전하다 헝그리 복서로 막 인생이 피려고 할 그때, 14회전까지 계속 얻어맞았지만, 그때까지 버텨온 김득구의 드림, 김득구의 땀과 눈물, 김득구의 피로, 김득구의 공포…김득구는 살아 생전 술을 마시면 노래했다. "권투란 무엇인가, 맞는 걸까, 때리는 걸까".


이 사각의 링에서 그 누군들 단 한 방의 펀치도 맞지 않으면서 단 한 방의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아웃파이터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야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일 뿐, 이름하여 '인파이터 코끼리군'. 우리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저 모호한 구름에 너무 바짝 붙어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어! 우리 삶이란 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싸움임에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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