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itrii Shostakovich(1906 ~1975)
Jazz Suite No.2, Op.50b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 50b(1~8)
Ricardo Chailly, cond.
Royal Concertgebou Orchestra
오늘은 한국 영화속에서 익숙해진,
Dmitri Shostakovich 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II
(Jazz Suite No.2 중 Waltz II) 가 흐르는
영화 2편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영화는 여름에 잘 어울리는 공포영화 중,
한석규, 심은하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흥행과 관객들의 관심이 높았던 "Tell me something",
그동안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수수께끼풀이의
정통 미스터리 영화 "번지 번프를 하다" 입니다.
I. March (3:07)
Tell me something 은 영화 "접속" 을 만들었던 감독의 작품으로,
"접속"의 사운드트랙과 마찬가지로 기존에 있던 음악을 삽입한
경우도 있고, 오리지널 스코어의 비중은 크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영화음악 작곡가가 만든 곡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음악들은 영화의 분위기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클래식 작품을 적절히 삽입했다는 것 또한
무시하지 못할 일이다.
이 영화에서는 Bach의
"푸가 사단조(Fugue bwv 569 G minor)" 와 Mendelssohn 의
"무언가 중 6번(Songs Without Words Opus 19 No.6)",
그리고 오늘 얘기하려는 Shostakovich 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II(Jazz Suite No.2 중 Waltz II )를 들을 수 있다.
"번지점프를 하다" 는 동성애적인 영화라는 오해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그런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앞서 얘기했던 우리들의 소울메이트는 어느 날 우연히 우리들을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그 만남은 때론 이성이 아닌 동성 친구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일 수도 있고,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필연적인 만남...
이것이 바로 영혼의 동반자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흐른다.
해변에서 태희가 쑥스러워하는 인우에게 왈츠를 추자고 하며
춤추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 II (Jazz Suite No.2 중 Waltz II) 이다.
Shostakovich, Dmitrii Dmitrievich (1906.9.25~1975.8.9)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
했다.
1923년까지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1925년까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와 막시밀리안 슈타인베르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사위)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27년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여
심사위원들로 부터 좋은 평을 받았지만 연주자로서 활동을 계속하지는
않았고 다만 자신의 작품만을 간혹 연주했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피아노로 성공을 거두기 전에 이미 작곡가로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4~25)은 발표되자마자 급속도로 전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교향곡의 양식적 근원은 매우 다양하여 차이코프스키와 폴 힌데미트,
동시대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매우 다양한 작곡가들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후 몇 년 동안 그가 쓰게되는 음악들에서 그는 더욱 많은 작곡가들로
부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당시 소련의 문화적 풍토는 상당히 자유로워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나 알반 베르크와 같은 전위음악가의 작품들도
연주되었다.
벨라 바르토크와 폴 힌데미트가 러시아를 방문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할 정도였으며, 쇼스타코비치는 공공연하게 당시의 전위적
경향들을 가지고 실험을 꾀했다.
니콜라이 고골리의 원저를 가지고 만든 그의 풍자 오페라 "코" 에는
서양음악의 신음악적 요소들이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에서부터 이미 풍자수법이 양식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것은 전위음악 작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랄한 풍자가 담긴
유머를 나타내기 위해 음향 자체를 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결과 다음에 작곡한 2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Ledi Makbet Mtsenskovo uyezda)"
(후에 " Katerina Izmaylov " 로 제목이 바뀜)은 더 좋은 작품이었지만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퇴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당국은 이 오페라의
음악 어법이 너무 급진적이라 생각했다.
1928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계획을 시작하면서부터, 소련 문화는
철저히 통제받기 시작했고, 음악에서는 직접적·대중적인 양식이 요구
되었다.
전위음악과 재즈 음악은 추방되었고, 한동안 정치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던 차이코프스키조차도 탄압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즉시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지는 않았지만, 일단
비판을 받게 되자 그것은 아주 혹독했다.
1936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의 공연이 난데없이 당국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은 공연장에 참석했던 스탈린의 개인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그는 정부기관지로부터 신랄하게 비판당했고,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뿐 아니라 당시 아직 초연되지도 않았던
교향곡 4번(1935~36)의 연주까지도 취소되었다.
그 다음으로 탄생한 걸작인 교향곡 5번(1937)은 작곡가 자신이
"비판에 대한 한 소련 예술가(쇼스타코비치)의 응답" 이라고 묘사한
작품으로, 당국의 규범을 잘 지켜나간 평범하고 낙관적인 작품일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정반대로 진지하고 우울하기 조차 한
애가풍의 음악이었다.
이 작품은 그러면서도 표현 방식이 매우 직접적이어서 청중들의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당국에서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교향곡 5번으로 초기 작품들에서 보였던 양식의 불안정에서
벗어나 마침내 개인적 양식을 만든 셈이 되었고, 이후 일련의 작품들에
계속하여 자신의 양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교향곡 4번, 5번 모두 구스타프 말러의 영향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교향곡 5번은 기법상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교향곡 4번이 선율적 악상들의 자유로운 증식에 기초해서 만든
다소 산만한 작품인 반면, 교향곡 5번의 1악장은 선율의 집약적 사용이
특징으로 음악의 어떤 한 부분이 음악의 기초를 제공하면서도 끊임없이
절정을 향해 유기적으로 성장해나간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푸가와 샤콘 등
바로크의 단일 주제 양식에 대한 그의 선호를 반영한다.
1937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에도 그는 계속해서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해 가을과 겨울에 점령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교향곡 7번을
작곡하여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것은 음악의 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곡이 작곡되었던 상황에 대한 낭만적 해석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작품의 질은 일관되지 못했다.
음악 외적 힘이 음악을 통제할 때면 수사적이고 양식적으로 보잘것없는
공허한 기법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다.
1942년 쿠이비셰프로 피난한 이후 1943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모스크바에 정착했으며 1945년부터는 레닌그라드 음악원
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0년대 중반에 쓴 작품들에는 교향곡 8번(1943), 피아노 트리오(1944),
바이올린 협주곡 1번(1947~48) 등 걸작들이 많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심각하고 음울하기까지 하여 당국으로부터 2번째
비판을 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 당국은 더욱 강경하게 이념적인 통제를 시작
했으며, 당시 일부 작곡가들이 사용하던 것보다 더 쉬운 음악 언어를
요구하게 되었다.
1948년에 모스크바에서는 안드레이 주다노프가 주재하는 악명 높은
회의가 열렸다.
는 소련음악계를 주도한 음악이론가로서 쇼스타코비치를 포함한 당시
소련의 주요작곡가들을 공격했다.
그결과 소련 창작음악의 질은 이후 몇 년 동안 늪에 빠지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의 조치로 인해 모스크바 음악원과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의 교편 활동을 금지당하는 등 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었지만,
현악4중주 4번(1949)과 특히 현악4중주 5번(1951)의 작곡을 통해 당국에
호소하여 극적으로 그의 음악 양식은 다시 당국으로부터 구제받을 수
있었다.
교향곡 10번이 작곡된 것은 스탈린이 죽은 해인 1953년, 이때부터 그는
주다노프의 노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16년 전에 작곡된 교향곡 5번에서처럼 작품의 질에 직접 호소하게
된 것이다.
이후 그의 전기가 작품목록으로 꽉 찰 만큼 방대한 작곡 활동으로
이어졌다.
대체로 당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서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지만,
교향곡 13번(1962)에서는 가사(시인 예프게니 예프투셴코의 시에 의한
것으로 반체제적 내용) 때문에 초연 이후 연주를 금지당하는 등 약간의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의 방해 없이 교향곡 14번을 작곡했다.
이 곡은 죽음을 주제로 한 11개의 연가곡을 기초로 만든 곡으로,
당국에 호소하기 위해 만든 곡이 아닌 내적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1949년에 미국을 방문했고, 1958년에는 이탈리아·,영국 등
전유럽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는 이미 로마에 있는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된 상태였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에서는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6년에는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금메달을 받았다.
상당수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사색적인 성향으로부터 내향성을
엿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는 대체로 사회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1953년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뒤, 그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으며 실제로 정치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작곡가로서는 당국의 정치적 이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여
실제로 당국과의 긴장관계에 처했을 때 작곡가로서 더욱 빛을 발하곤
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은 당국의 통제 속에서 샘솟는 창작력이 진솔한 음악
언어와 만남으로써 가능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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