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기행

문학기행/보길도

달빛그림자 2009. 12. 11. 00:28
 

▒ 문학예술산행
▒ 윤선도와 임철우 그리고 보길도
▒ 그 섬의 섬에 가고 싶다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두 달을 버티던 인조는 한강 동쪽의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름하여 병자호란! 조선의 순박한 땅은 오랑캐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당시 조선의 정세는 집권 서인과 소수 남인이 치열한 당쟁을 벌이던 때였다. 정치적으로 열세인 남인가문에 태어난 고산 윤선도는 집권 서인세력과 견줄만한 수장으로 자라났다.

1616년(광해군 8년) 성균관 유생시절, 집권 이이첨 일파의 부패를 격렬하게 비판했고 결과는 유배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의 생애는 20년 유배생활과 19년 은거생활로 이어졌다. 병자호란 당시, 해남에 은거하던 윤선도는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자 수백 명의 사람을 모아 강화도로 향했다. 그러나 왕이 항복했다고(?) 알려지자 그는 가차없이 치욕의 땅을 버렸다.

윤선도가 겨냥한 곳은 제주도라 알려졌으나 남해안의 한 섬에 돛을 내렸다. 그곳이 보길도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낙원의 존재방식 기록에 의하면 윤선도가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섬은 적막강산이었다. 오히려 그 점이 윤선도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사람이 살기에 척박하지는 않았다. 윤선도는 섬의 가장 높은 적자봉(격자봉·430m)에 올라 섬 전체를 조망한 후, 찍어 둔 곳곳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팠다.

섬에 자기 취향대로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보길도는 낙원이다. 처음에는 윤선도만의 낙원이었으나, 지금은 모든 지친 사람들의 낙원이 되었다. 낙원은 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낙원은 자신의 상극에 해당되는 대립자와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윤선도의 경우, 오랑캐에게 나라를 빼앗긴 치욕이 낙원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1980년 중반 소설가 임철우가 보길도를 찾았다.

고향 완도 평일도를 떠났던 그는 보길도를 둘러보다 예송리에 집을 지었다. 그에게는 80년 광주의 치욕이 있었다. 당시 전남대 4학년이었던 그는 수많은 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살육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러나 임철우는 목숨을 걸고 군인들과 싸울 용기가 없었다.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운 것이 그가 한 전부였다. 그는 광주를 겪으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만행과, 그 만행에 자신은 소심한 겁쟁이였다는 자책, 두 가지 치욕에 치를 떨었다. 임철우는 예송리 갯돌 해안을 거닐며 자신의 네모난 마음을 시나브로 둥글게 다듬었다. 그리고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낙원을 건설했다. 그의 장편소설「그 섬에 가고 싶다」는 그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갈 수 없는 낙원이다.

세연정의 비밀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은 주거공간인 낙서재, 놀이와 예술의 무대 세연정, 책과 차 그리고 전망을 즐기던 동천석실로 나눌 수 있다. 낙서재는 돌무더기만 남아 볼 게 없지만 나머지는 복원되어 그 옛날 윤선도의 빼어난 눈썰미를 짐작하게 해준다. 동천석실은 적자봉 맞은편 산 중턱에 자리잡았다. 밑에서 보면 왜 저 곳에 정자를 세웠을까 의아심이 들지만 막상 올라가 보면 참으로 시원한 전망을 선물해 준다.

이곳의 시선은 보길도 최고봉 적자봉의 눈 높이로 부용리 논들과 낙서재, 골짜기 구석구석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윤선도는 이곳에서 자신이 보길도에 부여한 질서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가는 세상을. 저 중앙 정치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그러한 질서가 이곳에서는 막힘이 없었다. 만약 그가 정치에 다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정자는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서 한양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세연정은 윤선도가 가장 큰 재력과 공을 들인 곳이다.

일기가 청화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기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혹은 옥소암(세연정 위의 작은 봉우리 바위)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 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 한다
-윤위의 「보길도지」

윤선도의 5대손인 윤위의 기록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읽어야한다. 단순하게 윤선도의 호사로운 취미로 읽는다면 세연정과 윤선도의 대표작 <어부사시사>의 비밀을 풀지 못한다. 세연정은 단순한 연못이 아니었다. 그곳은 관현악 연주와 춤과 노래의 무대였다. 즉 어부사시사는 세연정이란 자연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인 것이다.

정자와 연못, 연못 안의 작은 섬, 그리고 옥소암에 춤추는 모습이 비추는 연못 수면까지 세연정을 입체적인 예술 공간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무대 연출, 작곡, 작사, 연출까지 모두 윤선도의 몫이었다. 윤선도는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의 우두머리였지만 정치적 능력보다는 예술적인 감각이 탁월했다.

그가 속한 남인들이 세력을 잡았거나, 정치 판에 보다 가까이 있고자 했다면 당대의 권력자가 그러하듯 그는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을 것이다. 그의 미적 감각의 특징은 독창성으로 집약된다. 당시 어부사(漁父詞)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옛시를 모아서 곡조를 이룬 것으로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이 즐겼다고 한다. 윤선도는 이 노래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홀연히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려는 뜻을 갖게 한다’며 좋아했었다. 그는 놀랍게도 이 시를 새롭게 국문으로 창작했다. 국문이 가지고 있는 음악성을 간파한 것이었다.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징파(萬頃澄波)에 슬카지 용여하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을 돌아보니 머도록 더욱 좋다 *수국: 바다나 강, 연못 근처/슬카지: 마음껏/용여하자: 즐겨보자/머도록: 멀면 멀수록/인간: 속세/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노를 젖을 때 나는 ‘찌걱찌걱’ 하는 소리와 ‘어영차’ 기합 소리를 한자의 음차로 표현한 것 -<어부사시사 추사> 중에서

이 노래는 후렴구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당시의 국문은 어휘가 부족하여 한자의 음차를 사용했지만, 시 전체에 생동감과 음악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 섬의 섬에 가고 싶다

예송리에서 낚싯배를 타고 당사도(자개도, 자지도)로 향했다. 이 섬의 섬은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주요 배경이 된 곳이다. 영화는 원작 소설의 맛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보길도 노화도 당사도 등 여러 아름다운 섬을 보여주었다. 등대 앞 선착장에 내려 등대로 향한다.

등대로 가는 길은 어느 다른 행성으로 가는 길처럼 고요하다. 1909년에 세워진 당사도 등대는 2명이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한 명은 휴가를 나갔다고 한다. 26년째 등대지기를 해온 홍열운(54세) 소장이 뜻밖에 사람 구경을 한다. 그는 추자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시원하게 보인다며 남쪽 바다를 가리켰다. 홍소장은 코흘리개 적에 책을 읽고 등대지기를 동경했었다.

결국 그는 시험을 쳐서 등대지기가 되었다. 이처럼 고된 직업인 줄도 모르고. ‘외롭지 않나’는 질문에 그는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싫다고 했다. 사명감이 없으면 절대로 1∼2년을 넘길 수 없다고. 등대에서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나온다. 이 길이 당사도 트레킹의 백미다. 풀섶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을 만났다. 그 녀석은 잠을 자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머리가 삼각형인걸 보니 영락없이 독사다.

당사도는 아직 사람의 때가 타지 않아 자연생태계가 살아 있었다. 주민들 인심이 좋은 건 물론이고. 길가에는 바람을 막으려 쌓아둔 돌과 다양한 난대성 나무들이 도열하여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고개를 넘자 마을과 오래 전에 폐교된 향림분교가 들어온다. 바로 이 장면이었다. 영화 속에서 미친 옥님이로 나온 심혜진이 멍청한 백치미 얼굴로 이곳을 바라보던 것이. 육지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낙원을 떠나는 게 아쉬워 바다만 쳐다보고 있는데, 선창 후미가 왁자지껄하다. 한 눈에 섬 아낙들로 보이는 예닐곱 명이 신나게 뽕짝을 부르고 있었다.

율동을 곁들인 ‘차표 한 장’이 끝나자 힘찬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한 아낙이 다가와 신청곡을 주문했다. ‘목포의 눈물’을 말하자 그녀는 ‘사공의 뱃노래가∼’를 구성지게 뽑아낸다. 아낙들은 넙도에 사는데 보길도에서 장을 봤다가 노래방에서 1차, 흥에 못 이겨 돌아가는 배 안에서 노래를 불렀던 것이었다. 그녀들이 바로 「그 섬에 가고 싶다」에 나오는 그 ‘넙도댁’ 들이었다. 배가 넙도 앞에서 긴 고동을 울리자 아까 그 아낙이 다가와 말했다. 우리가 엄마여! 엄마! 넙도댁들은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총총히 섬 속으로 사라졌다. <글|진우석 사진|안찬호 기자>

멀고 먼 쪽빛 바다의 보물섬 윤선도는 보길도가 있었기에 명작 어부사시사를 낳았고, 오늘날 보길도는 윤선도로 인해 그 이름을 육지에 떨쳤다. 일반적으로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호사스럽게 살았다고 알고있지만, 풍류가 가득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윤선도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자. 보길도의 아름다움은 세 군데에 집중되어 있다.

윤선도 유적이 모여있는 부용리, 갯돌 해안으로 유명한 예송리, 보죽산(뾰죽산)과 큰 갯돌 해안 보옥리가 그곳이다. 세연정과 동천석실은 반드시 들러야 한다. 세연정에서 그 옛날 펼쳐졌을 오페라 어부사시사를 상상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또 무희가 춤췄다는 옥소암도 꼭 올라보자. 판석교를 건너 10분 오르면 나온다. 동천석실 바위에 올라 지긋이 내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예송리는 갯돌해안과 천연기념물 방풍림을 끼고 있다.

밤바다에서 갯돌이 파도에 쓸리며 내는 맑고 청량한 ‘돌의 노래’를 꼭 들어봐야 한다. 영화「그 섬에 가고 싶다」의 주요 배경인 된 당사도(자개도, 자지도)는 예송리에서 배를 타고 간다. 20여 가구가 사는 당사도는 아직 육지의 때가 묻지 않아 인심 좋고 자연 생태계가 깨끗하다. 등대에서 고개를 넘어 마을로 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평생 마음속 깊이 길을 낼 것이다. 보옥리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이다. 마을은 망월봉 줄기의 넉넉한 품에 폭 안겨있다. 뾰죽 솟은 보죽산 산행도 재미있고, 공룡알 같은 큰 갯돌 해변도 좋다.

책과 인터넷 싸이트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 임철우, 살림: 광주의 아픔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서정소설. 유년의 평일도 기억들과 보길도에서 지냈던 경험을 연금술해서 아름다운 장편을 만들었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 박광수 감독: 임철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원작에 미치지 못해 아쉽지만, 당사도 보길도 노화도 등 아름다운 섬들을 볼 수 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볼 수 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남편」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윤선도 부용동 유적들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http://my.dreamwiz.com/jung3pum/sijo/yoonsun1.htm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http://www.bokildo.co.kr/ 보길도와 윤선도에 관한 정보를 깔끔하게 소개하고 있다. 대상지에 꼼꼼하게 사진 자료도 많이 올려놓았다. http://www.bogildo.com/ 현대판 전남의 김정호로 불리는 본지 해남 주재기자 천기철씨의 홈페이지. 보길도와 해남 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가이드. 교통, 민박집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보길도 즐기기 보길도는 숙소를 예송리나 보옥리에 정하고, 부용리 윤선도의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예송리 손톱 만한 갯돌해안과 천연기념물 방풍림이 유명하다. 예송리에서 격자봉 큰길재를 넘어 부용리로 갈 수 있다. 시간은 50분 정도 걸리는데, 여름에는 잡목이 우거져 긴 바지를 입는 것이 좋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배경인 당사도는 예송리에서 주민들의 배를 타고 가야한다. 보옥리 예송리보다 덜 알려졌으나 예송리와 막상막하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우선 산이 높고 해변에 공룡알 만한 큰 갯돌 해변이 좋다. 또 뾰족한 보죽산에 오르는 것도 재미있다. 마을에서 뽀리기재를 통해 적자봉으로 오를 수 있으나, 여름에는 길이 험하다. 또 뽀리기재 가는 길목에 절터가 남아있다. 백련사터는 바다를 향하여 넓은 반석 위에 자리 잡았다. 절터까지 40분 걸린다.

↑ 안내도
완도와 해남 땅끝에 보길도로 가는 배가 있다. 완도의 화흥포(☎061-555-1010)와 석장리(☎552-1173)는 차를 실을 수 있고, 완도항은 사람들만 싣는다. 석장리는 차 값만 받고 사람 뱃삯은 받지 않아 경제적이다. 땅끝항(☎553-4269)과 화흥포는 7월 20일부터 수시로 배가 다니지만 꼭 전화로 시간을 확인할 것. 완도 쪽에서 배를 타면 해남 두륜산에서 달마산 땅끝 사자산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을 볼 수 있다.

예송상점(☎553-6363) 김동배씨에게 배편을 물어보면 사람을 연결해 준다. 당사도 트레킹은 등대 앞 선착장에 내려서 등대를 보고, 고개 넘어 반대편 마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돌아오는 코스가 정석이다. 미리 배를 그렇게 대달라고 이야기하면 된다. 꼭 등대지기를 만나 볼 것. 예송민박(☎553-6363)은 작년에 고풍스런 한옥을 현대적 시설로 바꾼 예송리의 대표적인 민박집. 주인아저씨의 인심이 좋다. 김은오씨 집(☎553-7066) 역시 주인 아주머니의 인심이 후덕하다. 보길도 민박집은 2인 1실 기준 25,000원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여름휴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에누리가 가능하다. 민박은 정원수를 잘 가꾸어 놓은 보옥민박(☎553-6650·김옥동)과 바닷가에 가까운 광웅민박(☎553-7040·이광웅)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