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y Holiday, Dante and Beatrice, 1883, Oil on canvas,
55.12 x 78.35 inches / 140 x 199 cm,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England>
'데카메론'의 저자요, 단테 연구학자였던 보카치오는 저서 '단테의 삶'에서 연인들의 운명적인 첫만남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던 생명의 정신은 너무도 격렬하게 요동쳤으며 작은 맥박소리에도 놀라 부들부들 떨었다. 보아라, 신이 오시어 나보다 더 강하게 나를 압도했도다.... 지복이 여기 나타나셨도다.'
<Lord Frederick Leighton, Dante in Exile, c.1864, Oil on canvas
60.04 x 100.00 inches / 152.5 x 254 cm, Private collection>
<Dante in Exile [detail: right]>
하지만 실제상황은 그림과는 다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난 10년 후 피렌체 시로부터 영구적인 추방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왜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하는 굴욕적인 형을 받게 되었을까? 당시 피렌체는 권력투쟁이 심각했으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귀족들은 일과처럼 반목을 일삼았고 정치는 음모와 계략, 살인으로 얼룩졌다.
단테 역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그가 피렌체 행정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이다. 단체가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알현하러 간 사이 그가 소속한 백당이 반대편 흑당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백당은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지지하는 일파이며 흑당은 교황 반대파를 말한다. 흑당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후 백당의 지도자인 단테의 집을 습격해 가재도구를 약탈하고 불까지 질렀다. 그리고 궐석 재판을 열어 그에게 세 가지 중형을 선고했다. 선고 내용은 5천 피오리나에 해당되는 벌금 납부, 2년 간의 귀양살이, 공민권 박탈이었다.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된 단테는 이렇게 피렌체에서 영구히 쫓겨나게 된 것이다.
<Dante in Exile [detail: left]>
그는 이후 5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을 떠돌며 살았다. 비록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의 보호와 후원에 기대어 살았지만 고향을 떠난 망명자의 심정은 늘 불안하고 비참했다.
이명옥의 <로망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