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확 시인의 그리움의 西天 - 전남 화순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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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시인의 시 운주사 가는 길 의 시작 배경이 된 운주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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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시작이 1월이 아니라, 봄이다. 추운 겨울에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봄이 되어야 비로소 뭔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제대로 이루어질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두터운 외투를 벗고 조금은 가벼운 차림으로 나서는 봄의 문학기행은 더 설렌다. 버스가 달리는 도로변 마다 개나리가 지천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개나리가, 모월 모일 모시에 일시에 피자, 약속한 것이 분명하다. 매화, 벚꽃, 산수유, 진달래 그리고 또 많은 꽃들이 봄을 말하고 있지만, 개나리야 말로 제대로 봄을 알려주는 용감한 전령사가 아닌가. 도시에서 정신없이 부대끼며 사는 동안 봄은 꽃과 함께 착실하게 와서 인간을 바라본다. 화사한 봄 햇살이 가득 내리는 화순 교육청 앞 거리에 임동확 시인이 서 있었다. 아니, 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는데,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임동확 시집 표지에 있는 김영태 씨의 컷, 그 시인의 모습과 똑 같다. | |
소개를 받기도 전에 안경을 낀 마른 얼굴을 보는 순간, 시인인 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암 조광조 유배지, 쌍봉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순고인돌유원지. 화순에 입성한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풍정을 임동확 시인, 그리고 화순군청에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재직중인 소설가 심홍섭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먼저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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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개혁이 성공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수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느끼게 하는 정암 선생은 35일간 화순에 머물다 사약을 받았다. 짧은 시일이었지만, 화순의 곳곳에 정암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정암의 품성과 학식이 높고 넓고 깊었다는 증명이다. 잠시만 더 기다려볼 걸. 한번만 더 참아볼 걸. 조금만 더 노력해볼 걸. 살아가면서 이런 후회를 한번쯤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염원하고 닦아온 수고는 때로 어이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믿었던 임금 중종에게서 사약을 받았던 정암의 운명처럼 말이다. 오래전 어느 깊은 못에 천년동안 도를 닦았으나 하루가 모자라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있었다. 오래전 어느 깊은 산에 비밀의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사람 때문에 하루가 모자라 인간이 되지 못한 천년 묵은 여우가 있었다. 그리고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천탑천불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으나 일하기 싫은 동자승이 꾸민 첫닭 울음소리에 허사가 된 운주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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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시인 | | |
하루가 모자라, 한 시각이 모자라 스러져버린 슬프고 아름다운 꿈들이다.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은 윤주사로 들어가는 길 옆 풀밭에서 임동확 시인이 문학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시 「운주사 가는 길」은 다섯편 연작이다. 독자가 시 한 편을 읽고, 시인이 그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인이 보고 싶어 왔건만 독자들은 낭송이 부끄러워 풀밭만 내려다보고, 시인은 낭송시킬 독자를 지목하느라 소란 아닌 소란이 일어났다. 그런 순간에도 시인과 눈이 마주치는 독자가 있게 마련이다. 궁금해서 슬며시 고개를 드는 순간, 미리 와 있던 시인의 눈과 만나버리는 법. 우리는 그렇게 시 몇 편을 시인과 함께 읽었다. 그 중 첫 번째 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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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석불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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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닭 우는 소리-운주사 가는 길 1 그리도 비밀한 그 골짜기 속에 / 이미 바깥에서 모두 저버리고 / 안으로만 待避해온 사람들 / 다급히 새 왕을 세우고자 했네 / 그러나 情死의 뒤끝처럼 / 미처 相好를 가다듬고 / 法衣 하나 제대로 음각할 틈 없었던 / 조급한 욕망의 흔적들만을 / 여기에 어지러이 남겨놓았네 / 그랬다네, 그들은 가장 은밀한 곳에 / 숨겨둔 돛배 한 척 가득히 / 창칼에 상한 육체들을 실어나르며 / 하루 낮과 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우려 / 돌을 쪼개고 힘든 목도질 나섰다네 / 하지만 원수 같은 첫닭 우는 소리에 / 제 어미 품에 깃들이지 못한 축생들 / 얼굴이 으깨어지고 심장이 터져 / 무더기로 떼죽음당해갔다네 / 더러 창자가 꾸역꾸역 기어나오고 / 사지가 갈갈이 찢겨나간 채 / 그 격정의 강물에 떠가기도 했다네 / 그리하여 결정의 시간 후에 엄습하는 / 허무처럼 그곳은 한 발 내밀면 / 절벽인 나락의 숲으로 남았다네 / 끊임없이 슬픔의 항해를 재촉하던 / 아흔 굽이 죽음의 기항지였다네 | |
시인은 처음부터 운주사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만큼 그렇게 유명한 절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80년 ‘광주의 봄’이 지난 간 후, 많은 사람들이 운주사를 찾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운주사는 천불천탑의 전설, 밀교 사원, 절과 주변의 지형이 거대한 배의 형상으로 탑과 불상은 배의 구조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설, 해상왕 장보고를 추모하는 공간이라는 주장까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황석영을 비롯한 많은 국내 문인과 예술인들이 운주사를 작품 속에서 표현했다. 독일인 예술가 요헨 힐트만은 운주사에 매료된 대표적인 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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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책 『미륵, 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에서 “석불들은 거꾸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된 세상에서 홀로 ‘똑바로’ 누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썼다. 독자들에게 운주사를 자기 식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고 말하는 임동확 시인은 이 곳에서 활로를 찾았다고 한다. 광주의 상처를 몸과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시인은 뱀술을 마시고서야 몸을 추스렸고, 운주사에서 마음을 달랬다.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사람에게도 상처로 남은 80년의 봄이 지난 후, 마음을 의지할 곳과 갈 곳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운주사를 찾기 시작했다. 아들을 원하는 여인네들에게 코를 내어준 부처, 미처 완성되지 못해 형상이 삐뚤삐뚤한 부처, 목이 달아나버린 부처. 그리고 탑. 그 앞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빌고, 아프고 쓰린 마음에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운주사 경내를 거니는 동안, 아주 오래전 한 사람이 첫 번째 탑을 세우기 위해 목도질을 시작했고 그 일은 21세기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탑 앞에 놓아두는 손길이 목도질과 무엇이 다르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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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경내에서 임동확 시인의 설명을 듣기 우ㅐ해 둘러앉은 문학기행 참가자들 | | |
오랜 비바람에 풍화된 그 천불천탑을 둘러보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아픔과 슬픔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인은 운주사에 왜 사람들이 오는지 알 것 같다고 했는데, 나는 후일 내가 다시 운주사를 찾게 되리라 짐작했다. 한번 걸음에 다 보고 돌아설 곳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와서 천천히 걷고 눈에 들어오는 탑과 불상을 오래 들여다보고, 돌아갔다가 다시 또 와야 할 곳이다. 왔다가 떠나는 봄, 그리고 다시 돌아올 봄처럼 말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임동확 시인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몸 체가 달아난 佛頭에 - 운주사 가는 길2」 의 마지막 구절에 ‘그리움의 西天’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 구절을 이 글의 제목으로 미리 정해두고 창밖의 어둠을 바라본다. 시인의 말처럼 그 어둠 속에는 밝음이 함께 있다. 그래서 어둠이 무섭지 않았다. 학교 예술대학 초대학장 당시의 책상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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