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숙의 녹두장군
▷ 송기숙(宋基淑, 1935년생)
1935년 7월 4일 전남 장흥군 용산면 포곡리에서 아버지
송복도씨와 어머니 박복단씨 사이에서 태어남. 장흥 계산
국민학교와 장흥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전남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 1964년 현대문학지에 평론 '창작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 이 추천되고 이듬해에 역시 평론 '이상서
설'을 추천받는다. 같은 해에 목포교대 전임강사로 임명된
다.
1966년 단편 <대리 복무>에 이어 장편 <자랏골의 비가>
등을 발표.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 6 월 27 일 전남대 교
수 10명과 함께 교육민주화선언인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
표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징역 4 년 자격정지 4
년 형을 선고 받고 광주와 청주교도소에 복역하다가 1 년
후인 이듬해 7월에 석방된다. 또 이로 인해 교수직을 박탈
당한다.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당시 문인으
로는 거의 유일하게 직접 항쟁 중심에 뛰어들어 광주항쟁수습위원으로 나섰다가 구속
되어 5 년 징역을 선고받고 이듬해 4 월에 석방된다.
전남대 국문과 교수, 민주화를 위한 교수 협의회(공동의장)(87), 민족문학작가회의 자
문위원 및 회장 역임. 한국현대사 사료 연구소장.
현대문학상(73), 만해문학상(94), 금호예술상(95) 등을 수상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자
랏골의 비가>, <도깨비 잔치>, <은내골 기행>, <녹두 장군>, <개는 왜 짖는가?>, <휴전
선 소식> 등이 있다. 주요작품집에는 단편집으로 '백의민족' (형설출판사 1972) , '도깨
비 잔치' (백제출판사 1978), '재수없는 금의환향' (시인사 1979), '개는 왜 짖는가' (한
진출판사 1984), '테러리스트' (도서출판 한겨레 1986), '어머니의 깃발' (심지출판사
1988), '파랑새' ( 전예원 1989)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암태도' ( 창작과 비평 1979), '녹
두장군' 전 12 권 (창작과 비평사 1981 - 1994) 이 설화집으로 '보쌈' (1989 실천문학사)
수필집에 '녹두꽃이 떨어지면' (한길사 1985), '교수와 죄수사이' (심지출판사 1988) 가
있다.
▷ 녹두장군(1-12)
이 절 서남쪽 5리쯤 되는 곳에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있고, 거기 아득히 쳐다보이는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 있는데, 이 미륵에는 예로부터 아주 괴이쩍은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다는 것으로, 그 비결이 이 세상
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한양이 망한다는 것은 조선왕조가 망한다
는 것이니, 이것은 나6라가 뒤집힌다는어마어마한 소리였다. 한데, 거기에는 비결과
함께 벼락살이 함께 봉해져 있어 누가 그 비결을 꺼내려고 거기 손을 대기만 하면 대
번에 우광쾅 벼락이 떨어져 그 벼락에 맞아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 벼락살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7십여 년 전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
란 사람이 멋모르고 그 비결을 꺼내려다 하마터면 벼락에 맞아 죽을 뻔했던 것만 보아
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계시는 대로 선운사 미륵
에 배꼽 속에 그런 비결이 들어 있다는 말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말 같습니다.
삼천년 전부터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인
데, 한양이 망한다는 소리는 이씨조선이 망한
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들 듣
고 계시는 바와 같이 지금 항간에는 오래 전
부터 그 비결을 동학도들이 꺼낸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우리 두령들은 그 비결을 꺼낸다는 소리를 한
일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제멋대로들 그런
소문을 퍼뜨려놓고 이제 와서는 우리들보고
거짓말쟁이니 허풍쟁이니 비웃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거짓말쟁이 허풍
쟁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그런 성화를 쉽게 물리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한편 이 일을 깊이 한번 생각해
보면 백성들의 이런 성화에는 그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중요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
가 싶기도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백성들의 이런 성화는 백성들이 그만큼 우리 동
학을 신뢰하고 이 못된 세상을 건지라는 제세의 대임을 우리들에게 억지로 떠맡기는 것
이 아니냐 이 말씀입니다. 관의 늑탈과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이 세상이 뒤바뀌기
를 그만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런 대임을 우리한테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벼락으로 그 비결을 지켜오다가 지금이 꺼낼 때라고 만백성의 입을 빌어 우리
들한테 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신데, 오접주님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아신 것
같소. 신불이든 하늘이든 거기다 비결을 감추어놀 때는 언젠가 그것이 쓰일 때가 있겠
어서 그것을 감추어 두었지, 거기다 영원히 처깔을 해두자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오. 그
것이 쓰일 때는 바로 지금이오. 그것은 아까 오접주님 말씀대로 하늘이 백성의 입을 빌
어 우리더러 꺼내라고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오. 지금부터 7십 년 전 이서구가 그것을
꺼낼 때 벼락이 쳤던 것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하늘의 호령이었소. 더구나 그건 이서구
너는 꺼낼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호령이기도 했을 것이오. 그 사람이 비록 명관
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썩어빠진 조정의 한낱 손발일 뿐이지 백성을 널리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접주들 가운데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았다.
이서구가 그 비결을 꺼내려다 경을 친 사연인즉 이랬다. 그가 관찰사로 여기 도임해온
지 얼마 안된 어느날, 선화당에 홀로 앉아 조용히 천지의 망기(望氣)를 보고 있자니, 뜻
밖에도 서남쪽에서 아주 상서로운 서기(瑞氣)가 한 줄기 하늘로 뻗쳐오르고 있었다. 깜
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그 서기가 예사로 상서로운 게 아니었다. 즉시 가마를 대령케
하여 그 서기가 뻗쳐오르고 있는 곳으로 바삐 달려가 보니, 그 서기가 바로 이 선운사
마애미륵 배꼽에서 피어오르고 있지 않는가? 너무도 이상한 일이라 이서구는 한참 동
안 쳐다보고 서 있다가 이내 사다리를 얽으라 하여 스스로 올라가 손수 쪼아보았다. 그
속에서 책자 한 권이 나왔다. 그 표지에는 '이서구 개탁(開坼)'이라 씌어 있었다. 너무
도 신기한 일이어서 떨리는 손으로 막 표지를 넘기려는데, 그 순간, 우광쾅, 벼락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해가 쨍쨍 쪼이고 있는 마른하늘에 느닷없는 날벼락이 천지를 뒤흔든
것이다. 겁에 질린 이서구는 부리나케 비결을 제자리에다 쑤셔넣은 다음, 그 자리를 회
로 단단히 봉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이서구가 본 것은 '이서구 개
탁'이라는 다섯 글자뿐이라는 것이다. <'녹두장군'에서 일부 발췌>
▷ 암태도(岩泰島)
- 줄거리 -
과거 독립 투사였던 서태석 등을 중심으로 한 소작인들은 지주 문재철에 대항하여
소작료를 내리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고 소작 쟁의를 벌인다. 그리하여 문재철의
논만 제외하고 가을걷이를 한다. 그것은 소작료 내기를 거부하려는 집단 행위였다.
그러나 계속 머리를 숙이는 벼를 본 소작인들은 가을 장마에 나락이 다 져 버릴까
걱정하다가 서태석과 박복영에게 건의하여 결국 소작 위원회를 소집하여 문재철
논의 가을걷이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번 걷이에 신석리 사람들도 도와주었다.
이렇게 지주와 소작인들, 즉 문씨 가문과 타성(他姓)바지들의 싸움이 표면화되고 첨
예화되는 와중에서도 박종식의 아들 만재는 문재철의 친척인 연엽과 사랑을 한다.
한편, 소작인들의 승리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노름을 자제하자고 하여, 단고
청년들의 부정을 단속한다. 그러나 문재철의 농간에 속아 찌그리는 이사를 가게 된
다. 그 후, 마름인 도리우찌와 김 서기의 계속되는 공갈과 꼬드김에 강제로 소작료를
빼앗기고 소작도 떼이게 된다. 심지어는 스스로 벼를 갖다 주고 빼앗겼다고 하는 사
람도 생겨났다. 또, 문재철의 마름들은 강제로 머슴을 동원하여 마을 사람들의 저항
에도 불구하고 밤을 이용하는 등 눈을 피해 벼를 빼앗아 갔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자경단을 조직한 소작인들은 도리우찌 패가 마을에 들어서면 계
속 감시하고 뒤를 밟는다. 그러다가 맨손의 서동오가 폭행을 당하고 이에 도리우찌를
경찰에 고소하지만 경찰은 이내 풀어 준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지주 공덕비를 회수하자는 말이 나오고, 좀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면민 대회를 연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문재철 패거리
들이 서태석, 박종유, 서동오를 폭행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신문 지상에 그 동안의 사
건 전모를 밝힌다. 그러나 경찰은 지주(地主)만 감싸고 돌았다. 그래서 문씨 집안의 여
자를 아내로 둔 만수는 아내를 친정으로 보내고 만다.
어느 날, 수병들이 몰려와 총을 쏘고 위협을 하며 개를 무참히 죽였다. 이에 분노한 서
태석과 소작인들은 지주 공덕비를 부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수곡리 문씨 가
문의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 사람을 때리고 닥치는대로 세간을 부수는 등의 횡포를 자
행한다. 소작인들 역시 그 보복으로 수곡리 문씨 마을에 피해를 입힌다.
이에 경찰에서 소작인측은 13명을 구속하고 지주측은 3명만 구속하자, 마침내 400여
소작인들은 목포 경찰서로 가서 농성을 한다. 그러나 오히려 26명이 더 구속되고 이들
은 광주로 이감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지사와 만난 만수와 박복영은 소작 쟁의 타결의 실마리를 풀고 결국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리하여 만재와 연엽의 사랑 또한 이루어지게 되고, 문
재철과도 화해하고, 마지막까지 출감되지 않았던 서태석 역시 석방된다.
<암태도>는 1979년 <창작과 비평>에 3회에 걸쳐 연재된 송기숙의 대표적인 장편 소설
이다. 이 작품은 <자랏골의 비가(悲歌)>와는 달리 불가피한 곳 몇 군데에서만 사투리와
민요 등을 사용하고 모두 표준말을 썼다. 그리고 토착어가 많이 사용된 것도 특징이다.
<암태도>는 반봉건적 반일적(反日的) 순수 민중 운동이었던 암태도의 소작 쟁의 실화를
소재로 했다. 1920년대나 1930년대 우리 농민들의 실상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며, 매몰
되었던 삶의 일상성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또한
반일적(反日的)인 성격이 많이 들어간 것 역시 이 소설이 갖는 의의라 할 수 있다.
▷ 자랏골의 비가
전라도 벽지의 한 마을 자랏골에서 묘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3 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친일지주인 양문이 일가와 이에 눌려 살면서 끊임없이 저항하고
시련을 당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주인공들이 생생이 살아 숨쉬는 대화체 문장으로 풀
어냈다.
▷ 작품 세계
작가의 사회활동 경력이 그의 작품을 제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송기숙의 작품은 어떤
경향성의 반영이 아니라, 본인의 경험주의적 한계를 넘어선 명작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교수로서, 사회진보 운동의 최선봉으로 늘 바쁘면서도 작품의 손을 놓지 않은 부지런함
과 철저한 고증노력, 타고난 문장이 그를 뒷받침해 왔기 때문이다.
대표작이 된 '녹두장군'에 이르러 그의 민중성과 필력은 최고조에 이른다. 무려 13년여의
세월이 소요된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갑오농민전쟁을 단순한 생존권 항쟁이 아니라 '반봉건'
'반외세' 기치를 높이 든, 농민들의 주체적인 전쟁으로 형상화한다. 조선말기부터 농민의
내부에서 일기 시작한 반봉건의식은 결국 근대사회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주체적인 운동
으로 전화되었다는 점을 '녹두장군'은 최초로 복원해 낸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이 북한에서
씌여진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에 버금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 작가의 고향
작가 송기숙의 고향은 장흥군 용산면 포곡리이다.
안양-용산간 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모산리가 나오는데 이 곳에서부터 이정표대로 최근
에 포장된 도로를 따라 산길을 3.4km 정도 달리면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포곡리가 나
온다. 마을 입구 중앙에 작가의 생가가 있는데 지금은 고종사촌이 살고 있다.
또한 마을 앞에는 장흥군에서 세운 '장흥의 문학인'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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