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 곳’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때, 산다는 것에 사랑하는 것에 지쳐 녹초가 되어 버렸었을 때, 그 곳은 마음 한 구석을 허물고 등장한다. ‘이리와 내가 너를 부드럽게 안아 줄께!’ 그 목소리는 포르말린 가루처럼 미세하지만 결코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 곳은 시야가 툭 터진 산등성이, 강변 오솔길,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고향집 뒷마당, 종착지가 없는 밤 기차, 텅 빈 공원의 그네… 이처럼 형형색색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장소의 공통점은 그 사람과 놀라운 친화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친화력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회귀와 성찰의 시간여행
추억으로 가는 길은 둥글게 휘어져 있고, 돌아오는 길 역시 둥그렇게 구부러져 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귀(回歸)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추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찰(省察)의 시간을 내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소설가 박범신의 추억의 공간을 훔쳐보게 된다. 적상산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그가 걸었던 회귀의 여정을 좇아 성찰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우리 는 괴목리에서 하룻밤을 묵고 적상산의 진면목이 간신히 남아있는 서창마을을 들머리로 산을 오를 작정이다. 밤늦게 괴목리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 적상산은 거대한 한 마리 짐승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마을은 고요했다. 때때로 두 눈에 불을 켠 자동차가 어둠을 두 쪽으로 갈랐지만, 어둠은 해면동물처럼 꿈틀거리며 다시 한 몸을 이루었다.
이곳에서 박범신은 처음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그 때를 ‘내 젊은 날 가장 외로웠던 한 시절’이라 적고 있다.
… 육십 년대 후반, 이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곳이었다. 겨울이 유난히 길고 눈은 겨우내 내렸다. 덕유산과 적상산 사이의 좁은 하늘에 어둠은 늘 점령군보다 빨리 오고, 눈 속에 묻힌 겨울 숲은, 어쩌다 바람소리, 어쩌다 짐승소리, 대부분은 무량겁(無量劫)의 침묵. 산과 어둠과 자연의 침묵에 눌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사람들은 서로서로 안쓰러이 돌아누워 잠들고, 천지간에 혼자 깨어 앉은 스물 한 살의 내 가슴은 지옥 불로타고, 그 소외, 그 그리움, 하나로 모아서 생전 처음, 나는 글을 썼다 …
그 글은 우여곡절 끝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유명 작가가 된 박범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 괴목리를 찾는다. ‘연필을 들고 원고지와 마주해 앉으면, 천지창조의 마지막날 아침처럼, 휘황한 광휘의 허공으로 형형색색 수천의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푸르렀던 날은 가버리고, ‘원고지 칸칸이 채워지는 부화되지 못한 나방들만’ 가득한 시절이 찾아온 것이다.
글쟁이가 밤을 세워도 원고지 한 장 못 채운다면 그것은 곧 상상력의 고갈을 의미한다. 작가로서의 생명은 끝난 셈이다. 그는 진짜 죽기로 작정하고 면도날을 산다. 치떨리는 외로움 속에서 처음 소설을 썼던 그 장소를 찾아가 제 손목을 그을 속셈이었다.
길의 미학
아침, 2층 민박집 방문을 열자 홍조를 머금은 적상산이 들이닥쳤다. 산 위로 시커멓게 퍼런 하늘이 펼쳐졌다. 일년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 한 청명한 날이다. 적상산이 지긋이 굽어보고 있는 괴목리 일대는 그 이름처럼 느티나무가 빼어난 마을이다.
빈 집 감나무에 꽃처럼 핀 감을 따고, 느티나무 옆에 있는 그네도 타고, 시간은 느릿느릿 게으르게 흘러갔다. 괴목리 아래 중리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우락부락한 혹덩이를 달고 있었다. 나무 안은 텅 비어 곰 한 마리 잠자리로 그만이다. 나무 바로 앞 벤치에 앉으니 바람은 잎사귀에 부딪치며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나무는 한 자리에 북 박혀 한 걸음도 떼지 못하지만, 바람이 불면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은 모양이다.
서창마을로 올라가는 길에서 적상산의 진면목이 등장한다. 붉은 퇴적암이 400미터의 절벽으로 산 중턱을 감싸듯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풍경에서 산은 적상산(赤裳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더욱이 절벽 단애(斷崖)는 단풍 빛을 흡수하여 더욱 붉은 빛을 토해낸다.
길은 팍팍한 오르막을 샘터까지 몰아댔다. 벌컥 물 한 사발 들이키고 나니 돌연 길은 순해진다. 이제 길은 40도가 족히 넘는 급경사를 길고 완만하게 풀어놓는다. 적산산성을 쌓던 적상면 민초들이, 부역 나간 지아비를 위해 밥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들이,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이 길을 걸어갔으리라.
수 백년을 이렇게 다져진 이 길은 문화재 급이요, 그 우아한 곡선은 예술이다. 그 길바닥은 활엽수들이 떨구어낸 나뭇잎이 차곡차곡 깔려있었다. 길은 장도바위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예전에는 이곳 바위 앞에서 길이 끊긴 모양이다. 고려시대의 무장(武將) 최영이 칼로 바위를 내리쳐서 길을 냈다고 한다.
등산로는 바위 앞에서 좌회전하지만, 옛길은 진짜로 바위 사이로 나있었다. 바위에 오르니 비로소 전망이 터진다. 멀리 새로 닦인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제 앞을 막는 산들을 뚫어버릴 기세로 곧게 뻗어 있었다.
적산산성 서문(西門)을 통해 드디어 입성(入城). 산성은 시간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은 어디 인간뿐이랴. 박범신은 ‘시간은 저의 존재증명을 위해 모든 사물에다 사멸의 옷을 입힌다’는 구절을 여러 번 소설 속에 적어 놓았다.
사멸과 불멸
박범신은 시간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사멸의 옷을 거부한다. 이것이 그가 자살하려는 본질적인 이유다. 따라서 자살은 불멸을 추구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별은 청·장년기의 긴 세월 동안 제 내부의 에너지로 불타며 빛나고, 사멸의 예감이 오면 초신성(超新星)이 된다.
꽃나무도 몸이 부실하면 다른 꽃나무보다 더 서둘러 꽃을 피우고, 그리고 열매 맺지요… 사멸에의 예감과 맞서, 제 모든 에너지를 한데 그러모아, 길고 긴 별의 수명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얼마 동안 그 어느 별보다 더 밝고 더 찬란하게 불타올라 마침내 통절한 오르가즘을 경험하는 것이다. 저자는 별의 비유를 들어 비장미가 가득한 주체적 사멸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운명인 사멸에 대항, 자살로써 불멸을 추구하는 저자의 욕망은 한갓 망집(妄執)에 불과했다. ‘비참한 건 사멸이라는 말, 그 허깨비 관념뿐이오’ 그것을 제일 먼저 지적한 것은 저자 자신이었다. 성안, 모든 활엽수들은 모두 알몸이었다. 바람이 지나가며 벗긴 옷들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발길에 채였다.
어떤 시인의 ‘헐벗은 나무의 에로티시즘’ 이란 시가 떠올랐고, 우리는 후끈 달아올랐다. 길은 마침내 우리를 안렴대에 부려놓았고, 우리는 헙! 일시에 괴성을 질렀다. 동·서·남, 세 방위의 시야가 일시에 터진 것이다. 왼쪽으로 백두대간 덕유능선이 요동치고, 오른쪽으로 열 겹이 넣는 산줄기들이 막 땅속에서 솟구친 듯 펼쳐졌다. 하산 길. 서쪽으로 기우는 볕에 노출된 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녹차 잎을 물에 넣으면 말라비틀어진 잎이 살아나 물을 우려내듯, 저무는 볕을 받은 낙엽들이 일제히 강렬한 벌건 빛을 품어내며 살아나고 있었다. 마치 ‘그리운 이에게 직진 강하(降下)’하는 가미가제처럼, 찬란하게 제 목숨을 불태우는 초신성처럼. 그 빛 속에서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황홀한 빛깔 앞에서 그대로 시간을 멈추고 싶은 것이었다. 이것이 박범신이 말했던 사멸의 예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예감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다. 한갓 찰나이자 헛된 욕망에 불과할지라도. <글|진우석 사진|정종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