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마음 한 구석이 저려온다. 12세의 나이에 천하를 얻었지만 작은아버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단종을 생각하면. 영월 청령포에 서서 서강을 바라보며 단종의 <자규시>를 읽어보면 강은 우리의 마음으로 흘러와 서늘한 물소리를 남기고 흘러간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한이 깊으면 글도 높아지는가. 이 시는 유려한 가락과 적절한 비유로 단종의 마음을 탁월하게 끌어낸 절창이다. 더욱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감이 시 전체에 드리우고 있어 읽은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단종의 절규처럼 ‘하늘은 귀머거리’였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금성대군이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로 세조와는 형제지간이다.
세종의 여러 아들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부귀와 권세를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홀로 단종을 옹호하다 순흥으로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죽령의 죽음과 순흥의 미래
이번 여행은 그 동안 단종에 가려있던 금성대군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 길에서 우리는 금성대군과 운명을 같이한 순흥 지역의 흥망성쇠를 만나게 된다. 우리의 길은 안축의 죽계별곡이 탄생한 죽계구곡을 통해 눈 덮인 소백산 국망봉에서 끊기게 된다
‘길은 뚫렸고 산은 박살이 났다.’ 새로 뻗은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을 지나온 소감이다. 우리는 시간 단축과 편안함을 얻는 대신 소백산을 구멍냈다. 길이 4.6킬로미터,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렸을 때 약 3분이 소요되는 거리다. 이제 천년 묵은 길인 죽령은 파란만장한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순흥은 풍기나들목으로 나와 부석사 방향으로 10분 달리면 나타난다.
죽령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거대한 길이 순흥의 미래에 어떤 발자국을 찍을지 자못 궁금하다. 금성단은 거대한 소나무 숲으로 쌓인 소수서원 맞은편에 초라한 몰골로 서있었다. 소수서원 옆 청다리(제월교) 근처는 민속마을을 만드는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었고.
1453년 수양대군의 야심은 단종의 오른팔이자 군부의 핵인 김종서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어 1455년, 눈에 가시였던 금성대군은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 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해 왕권을 접수하자 성삼문, 박팽년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복위를 도모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 영월로 유배되었고 금성대군은 다시 순흥으로 위리안치 되었다.
두 사람은 소백산 고치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부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아 단종복위를 계획하였다. 늘 그러하듯 계획은 사전에 발각된다. 금성단은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그리고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사림을 제사지내는 제단이다. 제단의 키 작은 담장 너머로 비로봉∼국망봉 능선이 아련하게 펼쳐져 더욱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은행나무의 예언
금성단 뒤에는 압각수라 부르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1100년이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나무는 순흥의 역사를 빠짐없이 나이테에 기록해 놓았다. 단종복위가 미수에 그치자 세조의 서슬 푸른 노여움이 순흥으로 떨어졌다. 복위에 관계한 선비들을 비롯 수많은 순흥 민초들이 살육되어 그들의 피가 죽계천을 물들였다. 40리 아래쪽인 동촌리까지 피가 흘러내려 그 마을을 ‘피끝’이라 부를 정도였다.
세조는 ‘역모의 고장’ 순흥부를 폐부시켜 풍기군에 병합시켜 버린다. 순흥이 사라지자 압각수는 스스로 고사했다고 한다. 이 무렵 순흥 민초들 사이에서는 요상한 유행가가 불려졌다.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단종)이 복위된다’는. 압각수는 그로부터 200년을 죽은 듯이 있다가 1643년 가지에 생기가 돌고 차츰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1682년에는 완전히 무성해졌다.
과연 노래처럼 1683년 순흥부는 환복, 단종 역시 복위되었다. 순흥 사람들은 금성대군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충절의 상징으로 흠모했다. 그 흠모의 정이 오늘날까지 전승된 것이 단석3리 두레골 서낭당이다. 본래 이 자리는 자작재를 넘어 고치령으로 향하는 옛길로 대대로 산신당이 있어왔다.
그러다가 1906년(고종43년) 금성대원을 모시는 상당(上堂)이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의 특징은 역사 속의 인물인 금성대군을 초군청이란 농민 조직이 맡아서 제사를 지내왔다는 것이다. 이곳 제사는 소를 제물로 바치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소를 ‘양반님’이라 부른다는 점이다. 순흥 지역 농민들은 금성대군 제사를 통해 농민들의 집단적 계급의식을 해소시키는 한편 서로의 화합을 다졌던 것이다.
풍류가 한결 같은 순흥
옛 순흥도호부는 경북의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관할 지역만도 현재의 충북 단양의 영춘·노동·의풍, 강원도 영월의 상동, 태백의 황지·철암, 경북 예천의 상리, 울진군 일부로 현재의 3도에 걸쳐있었다. 이러한 힘을 배경으로 고려말 신흥사대부 안축은 <죽계별곡>을 남겼다. 이 노래는 배점리에서 국망봉으로 오르는 계곡 초입인 죽계구곡에서 탄생됐다. 계곡은 얼어있었다. 도르르… 찰랑찰랑… 퐁퐁퐁….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은 참으로 청량한 음성을 가졌다. 투명한 얼음 밑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물의 걸음걸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죽령 남쪽, 안동 북쪽, 소백산 앞의 천년의 흥망 속에도 풍류가 한결 같은 순흥성 안에 다른 곳 아닌 취화봉에 임금의 태를 묻었네 붉은 살구꽃 어지러이 날리고, 향긋한 풀 우거질 땐 술잔을 기울이고 녹음 무성하고, 화려한 누각 고요하면
거문고 위로 부는 여름의 훈풍, 노란 국화 빨간 단풍이 온 산을 수놓은 듯하고, 기러기 날아간 뒤에 아, 눈빛 달빛 어우러지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좋은 세상에 길이 태평을 누리면서 아, 사철을 놀아봅시다
이 도도한 자신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2연은 순흥이 십승지(十勝地) 중의 하나인 양백지간의 승지였다는 배경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고, 3연의 ‘임금의 태’가 묻혔다는 것은 고려 충렬왕·충숙왕·충목왕 등이 화가 미치지 않은 이곳에 태를 묻었다는 이야기를 말함이다.
점점 길바닥에 눈이 많아지는가 싶더니 시야를 가리는 잡목이 한 순간 사라지고 눈이 뻥 뚫린다. 소백 능선에 붙은 것이다. 뾰족 솟은 비로봉 일대가 흰 복면을 하고 급습해 왔다. 이어 소백산 특유의 칼바람이 들이닥친다. 국망봉에 올라 영월과 순흥쪽을 번갈아 조망한다.
태백산 산신인 단종과 소백산 산신인 금성대군은 어딘가에서 서로 만나고 있을 것이다. 한번은 단종의 초청으로 어라연에서, 또 한번은 금성대군의 초청으로 죽계구곡에서.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싶다. 그 모습 어떠합니까…. <글|진우석 사진|장병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