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기생 매창(梅窓, 1573∼1610, 계랑, 향금)이 37세의 나이로 죽자, 두 남자가 눈물을 흘렸다.
맑은 눈 하얀 이(齒)에 눈썹 푸르던 낭자야, 홀연히 구름 타고 어디 갔느냐, 넋일랑 떨어져서 패읍으로 돌아가고 옥골은 어느 뉘가 고향에 묻었는가. 객지에서 죽어가니 조문객이 다시없고 오로지 경대 남아 옛 향기 슬프구나, 정미(丁未)년간 우리 둘이 다시 만나 즐겼는데, 슬픈 눈물 흘러내려 옷자락만 적시누나.
매창의 수려한 이목구비 묘사로 시작하여 절절한 슬픔이 짙게 배어나는 이 작품의 저자는 촌은(村隱) 유희경(1545∼1637)이다. 시를 통해서 그가 매창과 뜨거운 관계였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군가 설도의 무덤 곁은 찾아오려나.
*설도`:`당나라 중기의 이름난 기생. 음악과 시에 뛰어나 여러 시인들과 교류를 맺었다. 여기서는 매창을 가리킨다.
매창의 시와 노래를 끔찍이 아끼는 마음을 과장해서 표현한 이 시는 교산 허균(1569∼1637)의 것이다. 이처럼 당대의 이름 높은 두 사람은 매창과 어떤 관계였기에 추모시를 바쳤을까. 또 기생으로 알려진 매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번 여행은 매창의 행적을 쫓아가는 여정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그녀의 곁에 서있는 촌은과 허균을 함께 만날 것이다.
매창, 촌은을 만나다
부안의 진산인 상소산(성황산) 기슭, 서림공원 초입에 매창의 시비가 자리잡았다. 시비는 수북히 쌓인 낙엽을 끌어 모아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이 시비가 서있는 자리는 부안 현감의 관아였던 선화당의 후원으로 매창이 12살에 시녀(侍女)로 들어왔던 곳이다.
이곳에서 매창은 기녀의 길을 걷게 된다. 아버지는 고을 향리였는데 그녀에게 거문고와 시를 가르쳤지만 어린 매창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언젠가 지나가던 한량이 그녀의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집적거렸다. 매창은 즉각 운을 받아 응답하길,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한량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발길을 돌렸다. 그렇다고 하늘 높이 콧대만 올라간 기생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취객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쥐다 그만 옷이 찢어졌다. 서로가 난감한 이 순간,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도도하게 때론 슬기롭게 지조를 지키던 매창은 부안에 내려온 촌은 유희경을 만나게 된다. 이때가 촌은 48세, 매창 18세였다. 당시 촌은은 장안에 시선(詩仙)으로 그 이름이 높았었다. 훗날 촌은은 이 만남으로 ‘평생 지켜오던 지조를 파계’했다고 술회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끈끈하게 맺어진 것은 촌은이 천민 출신이었음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창이 보기에 자기처럼 신분이 천한 사람이 명문(名文)으로 이름을 날려 세간의 존경을 받는 것이 대견했으리라.
그로부터 2년간 두 사람은 들 끊는 마음으로 시를 주고받고, 원앙금침에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다. 그러던 어느 날 촌은은 훌쩍 한양으로 떠나버린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돌아올 기약조차 없었다. 이제 매창은 기나긴 독수공방에 들어간다.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쌀쌀한 초봄,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바느질하는 초라한 매창의 모습이 눈에 선한 시다. 어디 바느질이 제대로 됐을까. 애꿎은 손가락만 찔렸으리라.
님과 한번 헤어진 뒤로 구름이 막혀 있어, 나그네 마음 어지러워 잠 못 이루네 기러기도 오지 않아 소식마저 끊어지니 벽오동 잎에 찬 비 소리 차마 들을 수 없어라
촌은이 매창에게 보내온 편지에 적힌 시다. 그 역시 오동잎에 떨어지는 비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할 정도로 매창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매창, 허균과 사귀다
촌은이 떠난 빈자리에 시대의 반항아 허균이 걸어왔다. 허균은 매창의 시와 노래를 아꼈고, 매창은 그의 자유분방한 사상과 행동에 매력을 느꼈다. 매창은 이 때부터 허균의 조언으로 참선을 시작했다고 한다. 부처를 섬기고 행동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직 당한 허균은 지금의 우동리 선계폭포 위 정사암으로 들어갔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로는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중수 정사암기>
정사암은 폐허였다. 그곳은 돌무더기와 귀신 같은 감나무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계폭포 직벽 바위들은 그대로지만 ‘흰 무지개’는 수량이 적어 졸졸 흘러내렸다. 허균의 역작 「홍길동전」은 이곳에서 탄생했다고 했다. 허균은 폭포 벼랑에 앉아 지긋이 우동 벌판을 바라보며 홍길동과 자신의 앞날을 생각했으리라.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 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허균은 관직에 복귀, 매창 곁을 떠나간다. 허나 자신이 머물던 봉래산(변산)과 매창이 눈에 삼삼했는지 편지를 보내온다. 눈여겨볼 점은 두 사람의 관계가 친구 사이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매창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님은 오직 유희경 뿐임이 밝혀진다. 허균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 홍길동은 신분차별이 없는 땅 율도국으로 망명했지만 자신은 역모의 상소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고 만다. 내변산 736번 지방도 부안댐에서 직소폭포로 가는 길은 순하고 날은 늦봄처럼 따뜻했다. 한국전쟁 때 수많은 보물과 경판이 불탔던 대찰 실상사터를 무심히 지난다. 여기서 직소폭포까지가 내변산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봉래구곡(蓬萊九曲)이다.
부안 출신의 신석정 시인은 시인답게 촌은 유희경, 매창, 직소폭포를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 불렀다. 송도에 황진이,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가 그러하듯. 계곡 암반에 주저앉아 매창의 가장 아름다운 시를 생각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린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이 시는 배꽃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이별이 시간이 일순간 천리 공간으로 뛰어넘어 님에게로 향하고 있는 절창이다. 그 그리움의 대상은 촌은, 매창이 사랑한 오직 한 명의 남자다. 멀리서 폭포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매창의 가녀린 몸 안에는 직소폭포처럼 곧고 강렬한 정열이 용솟음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촌은은 혹은 허균은 그것을 알았을까. <글|진우석 사진|이훈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