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기행

문학기행/양양 미천골

달빛그림자 2009. 12. 11. 00:36
 
 

 
▒ 문학예술산행
▒ 선림禪林 가는 길
▒ 이상국과
양양 미천골

학창시절, 자신이 좋아하는 시 한편을 분석해서 발표하는 수업이 있었다. 미천골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총총히 빛나는 뭇 시들 중에서 단 한편을 고르기는 예상외로 간단했다. 그 무렵 우연히 읽었던 이상국 시인의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를 미련 없이 뽑은 것이다.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심상치 않은 첫 연이 내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당시는 미천골이 어디에 박혔고 어떻게 생겼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쉽게 읽힌다. 그 중 ‘나의 이름’을 부른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풀이했다. 이러한 해석은 내 안에 있는 작두날처럼 서슬 푸른 ‘내’가 현재의 무기력한 ‘나’를 질타해 줬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정말 몰랐었다.

미천골이 이렇게 깊고 웅장한 계곡인 줄을. 또한 시 발표가 인연이 되어 진짜 미천골을 찾게 될 줄도. 미천골에 가려면 백두대간 고개인 구룡령을 넘어야 한다. 구룡령에 서면 북쪽으로 말달려 가는 점봉과 설악의 능선에 쩍! 입이 벌어진다. 이곳은 백두대간이란 막연한 개념을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치환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구룡령을 넘다

또한 이 고개는 줄곧 백두대간 안쪽에 갇힌 시야가 한순간에 터뜨리는 해방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구룡령을 내려오다 나타나는 미천골로 우회전하면 해방감은 희열로 바뀔 것이다. 미천골은 오대산을 넘어온 백두대간이 응복산(1360m)에 이르러 크게 좌회전할 때, 그 원심력으로 뻗어나간 조봉(1182m)과 암산(1162m) 사이에 V자 형으로 깊이 패인 계곡이다. 길이가 무려 1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몸뚱이를 가졌다.

계곡의 초입, 아담한 너른 터에 선림원지가 자리 잡았고, 그 끝에는 청룡폭포를 뚫고 불바라기 약수가 흘러내린다. 따라서 산행은 절터에서 시작되어 약수에서 맺게 된다. 미천(米川)골이란 지명은 선림원에서 씻는 쌀(米) 뜨물이 내(川)를 이루었다 하여 붙여졌다. 선림원은 통일신라시대 해인사를 지은 순흥법사가 804년에 창건했다고 알려졌는데, 이곳의 중요한 점은 당시 신라 왕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교종에 반기를 들고 새로이 등장한 선종 세력이 한 발 물러나 힘을 키우던 근거지였다는 점이다.

상처 입은 삼층석탑과 귀가 떨어져 나간 석등이 묵묵히 서 있는 선림원터는 쓸쓸했다. 하지만 마음은 착 가라앉아 아주 편안했다. 이상국 시인도 이곳을 찾았었다. 그는 폐허의 절터를 할 일 없이 해동갑하다가 선림(禪林)이란 말에 주목하여 <禪林院址에 가서>라는 절창을 낳았다.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武林으로 돌아가네

미천골은 절정이었다. 활엽수들은 산란기의 물고기들처럼 일제히 혼인색을 띠었다. 숲에는 드문드문 전나무들이 뒤섞여 전반적인 단풍 빛은 부드러웠다. 그뿐이랴. 이틀 전에 내린 폭우로 계곡의 수량은 풍년이었다.

단풍은 물과 어울려야 제맛인 법! 미천골은 말 그대로 선림이었다. 제아무리 선림이 등을 떼밀어도 이 계곡의 끝에 숨겨진 불바라기 약수 몇 대접은 들이키고 무림으로 가야겠다! 미천골 계곡 길에는 임도가 깔려 있다. 임도가 놓이기 전에 이용되었을 오솔길은 사라졌지만, 다행히 임도는 산과 어울려 흉물스럽지 않았다. 길은 왼쪽 조봉의 등성이를 따라 찬찬히 고도를 끌어올린다.

폭포를 뚫고 나오는 약수

계곡의 마지막 민가인 김금녀씨 방문을 두드렸더니, 눈이 맑은 청년이 나온다. 그는 나그네들에게 꿀술을 내놓았다. 벌집과 여러 약초들로 담근 술이라 한다. 너도나도 자청해 벌주를 들이킨다.

길은 좌로 우로 연방 S자를 그리고 사람은 갈지(之)자를 그린다. 단풍에 취했는지 벌주에 취했는지…. 계곡물이 까마득히 벼랑 아래로 내려가 있을 무렵, 불바라기약수로 가는 오솔길을 만났다. 물과 나란히 걷는 정겨운 길. 그 길이 끝나는 곳에는 두 폭포가 가랑이를 쫙 벌리고 있었다. 이십 미터 높이의 청룡과 황룡폭포. 불바라기약수는 청룡폭포 중간쯤에서 암반을 뚫고 흘러내린다.

예전에 이 약수를 마시려면 본의 아니게 암벽타기를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호수가 연결되어 있어 밑에서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물 한 모금 먹고 폭포 한 번 보고. 또 한 모금 꿀꺽 단풍 한 번…. 게으르고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낸다. 좀처럼 선림을 떠나 무림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계곡 아래에는 블랙홀 같은 어둠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은 스멀스멀 연기처럼 몸뚱이를 퍼뜨리며 야금야금 단풍 빛을 잡아먹는다. 나 이제 선림에 등 떠밀려 무림으로 돌아가네! <글 |진우석 사진|장병희 기자>

일곱 빛깔 단풍의 깊고 웅장한 계곡 백두대간 고개인 구룡령을 넘어 양양 미천골로 이어지는 이번 여행에는 양양 출신인 이상국 시인의 쓸쓸한 시들과 동행하게 된다. 구룡령에서 바라보는 점봉과 설악 능선에 입이 쩍 벌어진다. 이곳에서 약간의 시간을 투자하자. 미천골은 10킬로미터가 넘는 깊고 웅장한 계곡으로 선림원의 역사와 계곡미가 함께 흐르는 곳이다. 계곡 끄트머리에는 청룡과 쌍룡폭포가 가랑이를 쫙 벌리고 있는데, 그 중 청룡폭포 암반을 뚫고 불바라기약수가 흘러내린다. 우리 나라 약수 중 가장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꼽힌다.

계곡은 황이리 마을-선림원터-휴양림사무소-불바라기산장-김금녀씨 집-샘골폭포-상직폭포-주차장(여기까지 차로 오른다.)-불바라기 약수가 차례대로 나타난다. 품질 좋은 토봉 꿀을 생산하는 김금녀씨 집에 들러 벌통을 구경하고 벌집과 약초를 넣어 담근 꿀술(2리터에 2만원)도 마셔보자.(꿀은 1.8리터에 20만원) 주차장에서 불바라기약수까지는 4.8킬로미터로 1시간 20분 걸린다. 길은 임도를 따라 걷게 되는데, 다행히 임도는 산과 잘 어울려 흉하지 않다.

길은 고개를 넘어 하면옥치까지 연결된다.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불바라기 약수에서 고개를 넘어 법수리치 마을에 넘어가면 좋겠다. 허나 고개를 넘어 임도에서 법수리치 마을로 내려서는 길을 찾기 힘들다. 불바라기약수에서 하면옥치까지 걷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산악자전거 코스로 그만이다. 길 중간에 바위가 무너져 내려 지프 오프로드는 불가능하다.

책과 인터넷 싸이트 「집은 아직 따뜻하다」, 이상국, 창작과비평사: 양양 출신인 이상국의 시에는 강원도의 쓸쓸한 정서가 녹아있다. 이 시집에는 미천골과 선림원지, 남대천, 샛령(대간령), 진전사지, 건봉사, 화진포, 울산바위 등지를 여행하면서 쓰여진 시들이 많다. 이 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선림원지에 가서>는 ‘http://www.toursorak.com/cul/cul-123.htm’에 전편이 나와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동해·설악」,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양양과 설악’편에 선림원지와 진전사지의 해설이 잘 나와있다.

↑ 개념도
양양은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아까운 길이다. 뚜벅이라면 할 수 없이 동서울터미널☎02-446-8500)에서 양양이나 양양 경유 속초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차가 있으면 취향이나 일정에 따라 구룡령(56번 국도)이나 한계령(44번 국도)을 넘는다. 양양에서 미천골로 가려면 08:10, 11:00, 13:50, 15:00, 18:10 갈천행 버스를 타고 황이리 입구에서 내린다.

밤은 미천골에 들어와 맞는 게 좋겠다. 계곡에 가장 깊이 자리잡은 순으로 미천골자연휴양림(☎033-673-1806), 불바라기산장(☎033-673-4589), 황이리 마을 민박집들(이장·☎033-673-4589), 이렇게 세 군데를 선택할 수 있다. 휴양림은 가족 단위가 좋겠고, 예쁜 카페를 겸한 불바라기산장은 친구와 연인들, 황이리 민박집은 주머니가 빈 여행객들에게 제격이다. 휴양림은 되도록 일찍 예약을 해야하고, 방갈로 크기에 따라 3만-6만선.

산장은 4인용 방이 4만원 또는 6만원이고 피자(2만원)와 산채정식(1만원)을 먹을 수 있다. 민박은 2만원선. 또 서울에서 구룡령을 넘기 전인 홍천 광안리에 위치한 달구지식당(☎033-432-5230)을 빼먹을 수 없다. 걸쭉한 동동주에 곁들여 생두부와 막국수를 먹으면 부러울 것이 없다. 각각 4천원. 양양 시내로 나오면 단양식당(☎033-671-2227·고광휘)의 국수 맛이 일품이다. 군청사거리 근처에 있는 이 집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데, 메밀국수는 가자미식혜를 양념으로 써서 맛이 독특하다. 값은 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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