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천오백년 전, 이곳 부여까지 쫓겨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에 대하여. 그리고 나당(羅唐) 연합군에 밀려 낙화암(洛花巖)에서 떨어짐으로써 역사 속에서 지워져버린 망국(亡國)에 대하여. 늦은 밤 숙소를 나와 백마강변을 어슬렁거리다 부소산에 걸린 둥근 달을 바라보며 생각해 봅니다.
시인 신동엽은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고 했지만, 나와 백제는 저 달과의 거리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부여를 생각하면 늘 아스라한 여운이 남습니다. 꿈이 좌절된 사람의 뒷모습 같은 쓸쓸함 같은 것이요.
부소산 낙화암이 그렇고, 또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우금치에 세워진 ‘동학혁명 위령탑’이 그렇습니다. 부여에서 느껴지는 ‘미완(未完)’의 여운을 처음으로 읽어낸 사람은 부여 출신 민족시인 신동엽이었습니다. 그는 ‘미완의 아쉬움’을 ‘미완의 혁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신동엽과의 첫 만남
신동엽을 만난 것은 막 대학을 입학한 해 4월,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수업을 빼먹고 잔디밭에 누워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을 읽었지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몸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 신열(身熱)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작품은 당대 4.19 혁명의 시점에서 1919년 3.1운동의 성과를 아우르며, 근대 역사의 분기점이자 미완으로 끝났던 동학혁명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놓은 작품입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서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시(詩)라는 장르가 이렇게 폭넓게 역사를 다룰 수 있다니!’ 시에 대하여 새롭게 눈떴다고 할까요. ‘나도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바로 신동엽의 〈금강〉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홀로 부여를 찾았습니다. 부소산 낙화암에서 하염없이 백마강을 바라보다, 시인의 생가 툇마루에 앉아 봄볕을 쪼였습니다.
방명록에 치기 어린 마음으로 ‘동엽이형 저 왔어요, 나도 당신과 같은 시인이 되겠습니다’ 라고 적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번 문학예술산행은 옛 기억을 되살려 부여를 찾았습니다. 부소산에서 낙화암 거쳐 고란사까지. 고란사에서 구드래나루까지 유람선으로, 강변 길을 걸어 신동엽 시비와 생가. 부여는 이런 모든 곳을 설렁설렁 걸어다닐 수 있어 좋습니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높이 100미터쯤 되는 야트막한 산입니다.
북쪽으로 백마강(금강)을 두르고 있고, 백제는 이곳에 산성을 쌓았습니다. 지형적으로 남하하는 고구려 세력을 방비하기 위한 천혜의 요새였던 셈이었지요. 부소산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산성 길의 곡선입니다.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의 위패를 봉안한 삼충사(三忠祠)를 지나서 잘 닦여진 길을 버리고 산성 길로 접어듭니다.
그러면 굵은 소나무가 운치 있게 서있고, 길은 성의 굴곡을 타고 굽이쳐 흐릅니다. 나무에 가려진 백마강이 슬쩍 얼굴을 보여주는 곳에 주저앉았습니다. 흔히 백제문화의 특징을 ‘온화함과 부드러움’이라고 합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된 우리 나라 불상조각을 대표하는 명품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가, 수많은 기와와 벽돌의 꽃무늬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 산성 길도 마찬가집니다. 비록 산성은 천년이 넘은 후대에 복원됐지만 자신의 핏줄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백마강과 낙화암의 전설 다시 읽기
낙화암에 이르러 하마타면 비명을 지를 뻔했습니다. 내심 기대했었던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의 유장한 곡선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강변의 모래톱이 흉측하게 파헤쳤기 때문이지요. 연방 트럭이 몰려와 모래를 싣고 사라져 버립니다. 부드러운 백제 문화의 특징을 말없이 보여주었던 강물이었건만….
백마강(白馬江)은 부여지방을 흐르는 금강(錦江)을 말하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어감(語感)은 매우 아름답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백마강 이름만큼 백제 오욕(五慾)의 역사를 반증해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백마와 용은 우리 문화의 상징체계에서 신령스러운 동물들로써 일종의 금기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장수는 금기로써 더 금기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그 자신 자체가 금기가 되어버립니다. 백제의 민초(民草)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 전설은 생각할 때마다 백마는 백제, 용은 우리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아심이 듭니다. 어떤 전승 과정을 통해 붙여진 이름인지 알 수 없지만 백마강은 우리 나라 역사의 아픔이 그대로 반영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망국 백제를 비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낙화암에서 떨어졌다는 삼천 궁녀의 전설입니다. 그러나 이 전설은 승리자 신라와 당나라의 입장에서 생산된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는 의자왕의 방탕과 사치가 멸망을 초래했다는 논리가 되겠지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 선생은 ‘3천 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이 쫓기고 쫓기던 백제의 병사와 민초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지,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동엽 생가 방명록의 변화
약수로 유명한 고란사에 들러 고란약수를 들이키고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배를 타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釣龍臺)와 낙화암을 역동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신동엽은 전주사범학교 학생일 때, 백마강을 거슬러 오르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했습니다.
동남리에 위치한 시인의 생가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미술 선생님 부부가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습니다. 툇마루에 앉으니 햇살이 잘 비추는 것은 여전합니다. 예전에 내가 썼던 방명록이 떠올라 들쳐보면서 조금 놀랐습니다.
과거에는 작고한 시인과 대화하는 글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두서없는 낙서도 많고 전혀 시인과 상관없는 글도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그만큼 문학이 학생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그 중에서 단정한 글씨체가 여러 번 등장하여 눈길을 끕니다.
부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 생가를 찾았다. 농협 갔다 돌아오는 길에, 삽 위에서 비를 맞고 있는 새가 불쌍타… 조금 있으면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이겠지. 화단에 국화꽃 한 송이가 피었다. 이곳을 좀 더 많은 꽃들로 장식했으면 좋으련만. 어제도 야근을 했다. 점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천근무게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이렇게 흘러보내도 되는 것일까.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야기가 나오는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가 떠올랐다. 모모처럼 누군가 훔쳐간 내 시간을 되찾고 싶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신동엽의 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있기에 부여와 백마강은 아직도 ‘미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겠지요.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 그러나 이제 오리라, 갈고 다듬은 우리들의 푸담한 슬기와 자비(慈悲)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 세상 쟁취해서 반도(半島) 하늘높이 나부낄 평화 <금강> 중에서
‘미완의 혁명’으로 점철된 부여에서는 미래에 찾아올 혁명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신동엽이 예언했듯 미래의 혁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찾아올 것입니다. 다가올 그 세계에는 ‘철학자와 시인의 정신성과 육체 노동이 이상적으로 결합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전경인(全耕人)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글·진우석 사진·장병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