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소요산(逍遙山) 길을 오르며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 〈자화상〉 떠올렸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첫 구절부터 공격적으로 시작되는 이 시에는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라는 곱씹을만한 대목이 나온다. 이 시구는 평소에 궁금해하던 의문점에 빛을 던져 주었다.
나는 평소에 유랑(流浪)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장돌뱅이, 선질꾼, 남사당패, 역마살이 낀 사람들, 산을 맴도는 알피니스트…등등. 그들에게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미당의 시구로 풀어내면 그것은 ‘바람’이었다. 유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바람’이 숨어있다.
그들은 바람이 불면 길을 떠나고, 바람이 자면 정착한다. 그들을 떠나게 하는 동력(動力)인 ‘바람’은 그들의 내면에서 불어오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는 폴 발레리(Paul Valery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시구처럼 유랑하는 사람들은 바람이 불 때만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점점이 꼬리를 무는 이러한 생각들은 소요산 정상에 서자 바람처럼 흩어졌다.
소요산에서 본 미당의 삶과 죽음
시야가 툭 터지면서 바다가 등장한 것이다. 줄포만 바다는 내륙을 향해 깊숙이 파고들고, 줄포만 건너편 변산(邊山) 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가파른 소요산 북사면이 평지와 만나는 지점에 아담한 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이곳이 미당이 태어난 선운리(仙雲里·질마재 마을)다. 미당은 바다와 내륙이 만나는 풍요롭고 장쾌한 풍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선운리에서 찻길 건너에 위치한 안현리 야산에 묻혀있다. 지난 12월 24일 저녁 크리스마스 전야(前夜). 기습적으로 내린 눈 덕분에 사람들이 들떠 있을 때, 미당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일찍이 미당은 〈내리는 눈밭속에서〉라는 시에서 눈 내리는 소리가 마치 ‘괜, 찮, 다,… 괜찮다…’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었다.
그리고 미당은 ‘다… 괜, 찮, 다,…’며 웃으면서 이승을 떠나버렸다. 이번 문학예술산행은 미당을 위해 준비했다. 우선 미당의 품으로 들어가는 일주문에 해당하는 질마재 고개와 소요산을 거쳐 선운리로. 미당의 49재에 참석하고 생가와 마을에서 시집 「질마재 신화(神話)」를 음미하기로. 또 미당의 시비가 있는 그 유명한 선운사(禪雲寺)를 빼놓을 수 없겠고, 너무도 아름다운 후일담을 담고 있는 시 〈추천사( 韆詞)〉가 탄생한 줄포(茁浦)를 출구로 잡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질마재는 승용차가 넘기 힘든 비포장 길이었지만, 지금은 번듯한 이차선 길이 깔려있다. 더구나 소요산을 바라보는 수강산을 흉측하게 도려내며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리가 미당의 산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미당의 49재가 작파한 후였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문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미당의 산소에는 다정한 쌍무덤(미당과 그 부인)이 줄포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선운리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미당의 생가를 묻자 너도나도 앞장선다. 생가는 폐허였다. 집은 슬레이트 지붕을 얻은 세 칸으로 단출했고 마당에 우락부락한 대추나무 한 주가 서있다. 사진을 찍자 까르르 깔깔거리며 질마재 아이들이 웃는다. 아이들이 다니던 선운초교는 3년 전에 폐교되어 한창 미당문학관 공사가 진행중이다. 아이들은 다음에 다시 꼭 오라며 우리를 배웅한다.
질마재 - 현실에서 신화의 세계로
질마재는 미당의 고향 선운리와 반대편 오산리를 넘나들던 고개 이름이자 미당이 살던 마을 이름이다. 줄포만 바닷가에 사는 선운리나 심원면 사람들이 고창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름길인 질마재를 넘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가난해, 김성수씨의 아버지인 동복영감의 전답을 소작하거나, 아니면 합자해 조그마한 배로 어업을 하거나, 밖에 사람들이 와 경영하는 소금막에서 노동을 하거나, 또 아니면 질마재를 넘어 다니며 어물행상을 하였다.”
질마재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미당이 자서전에서 술회한 말이다. 미당은 ‘두루 따분하고 가난하고 서글픈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질마재 사람들을 시집 「질마재 신화」를 통해 해학적으로 살려놓는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만,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습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해일(海溢)」중에서
당시 질마재 마을은 바닷물을 막은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따라서 고기잡이배가 포구였던 마을로 드나들었고, 개천을 따라 밀물이 마을까지 올라오기도 했었다. ‘해일’ 속에서 할머니의 ‘수줍은 기다림’을 찾아내는 미당의 솜씨와 ‘누에가 실을 뽑듯이’ 옛날 이야기를 풀어내는 미당의 외할머니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질마재 신화」가 탄생했겠는가.
똥오줌 항아리를 거울삼아 망건 밑을 염발질하는 ‘질마재 상가수(上歌手)’, 잇몸으로 마른명태를 눈 깜짝할 사이 해치우는 ‘눈들 영감’, 오줌 기운으로 아이들을 겁주던 ‘이(李) 생원네 마누라’, 암소 두 뿔 사이에 진달래꽃을 매달던 ‘소 X한 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 한물댁’… 등등. 지금 그들은 질마재에 존재하지 않지만, 미당의 시를 통해서는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즉 신화로 남은 것이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선운사를 품고 있는 선운산 줄기는 장수강(長壽江)을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미당은 선운사에서 빼어난 시 한편을 남겼다. 그 시는 선운사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육필 원고 그대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디다. -〈선운사 동구〉
흔히 선운사 동백은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만, 미당은 오히려 피지 않은 동백꽃을 노래했다. 그것도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비유하며 앞으로 피어날 꽃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줄포로 향했다. 이곳은 미당이 열 살 때 이사와서 ‘줄포공립보통학교(현재 줄포초등학교)를 다닌 곳이다. 줄포(茁浦)는 갈대밭이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예전에는 전북에서 군산 다음으로 두 번째 포구였다고 한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당시 열 살이던 미당은 열 일곱 정도의 남숙이라는 처녀와 인적 없는 학교를 찾았다. 남숙은 이웃집 처녀로 학교에서 킹카로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마침 미당이 이사왔다고 해서 보러왔던 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을 방문하며 놀다가 그네를 타러 학교로 온 것이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눌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추천사(韆詞)〉
남숙은 미당에게 그네를 타라 했지만, 미당은 ‘어린 마음에도 여왕을 향단으로 쓰는 것은 차마 못하겠고 자기가 향단이가 되는 게 훨씬 좋게 느껴져’ 남숙을 태우고 밀어준다. 그 때의 심정을 미당은 ‘아름에 겨운 꽃바구니의 노다지를 안듯하고 있던 내 느낌을 뭐라 했으면 좋을지. 나는 그 뒤에 그네 옆에 서거나 그네를 생각할 때마다, 늘 이때의 일을 마음속에 되살려 내왔고, 또 시로도 이걸 써 보려 무진애는 썼으나 도무지가 그 찬란한 자유를 다 말할 길이 없다’고 술회했다.
바로 그 ‘찬란한 자유’가 시가 된 것이다. 이 시에서 향단이는 미당이고 춘향이는 남숙이지만, 남숙의 ‘울렁이는 가슴’ 역시 미당의 것이었다. 이제 미당이 떠났으니 어느 누가 ‘한국어의 질박한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까.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 우리의 가슴을 밀어 올려주겠는가. <글 ·진우석 사진·장병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