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과 이효석
36세(1942년)에 뇌막염으로 사망한 이효석처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봉평은 이효석과 그의 단편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자장(磁場)안에서 숨쉬는 마을이다. 그곳에는 수익성이 떨어져 사라졌던 메밀들이 9월초, 눈이 내린 듯 흐뭏하게 피어난다.
꽃이 만개하면 열리는 '효석문화제'의 대규모 행사. 국내 유일한 문화마을인 '효석문화마을', 또한 '메밀꽃 필 무렵'이란 간판을 가진 식당과 여관들... 제아무리 문학과 담을 쌓은 사람이라도 '이효석'이라는 작가와 그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효석, 그는 진정 복 많은 작가다. 하지만 생시에 이효석은 과연 행복했을까?
봉평 잘날
장날인 8월7일 찾은 봉평은 '메밀꽃 필 무렵'이었다. 메밀은 총총히 작은 꽃봉오리를 다닥다닥 달고 있었다. 내심 흐믓하게 피어난 메밀꽃을 기대했건만. '가산문학선양회'사무국장 강영하 목사(40세)에 의하면 9월 1~3일 축제 기간에 맞춰 메밀을 신는다고 한다. 선양회에서 일하는 최형묵씨(38세)의 안내를 받아 장터를 걷는다. 이효석은 독특하게도 쓸쓸한 파장 무렵을 왁자한 소란스러움으로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살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혹혹 볶는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장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쪽으로든 밤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군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소설과 같은 장터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지만 봉평장은 규모가 작아 아담한 맛이 있다. '충주집 기념비'뒤로 '충주집'이란 간판을 단 소머리국밥집이 서있다. 충주집은 예전부터 이곳에 자리잡은주막집이다. 소설에서는 충주집 주모를 놓고 허생원과 동이가 갈등을 벌인다.
길을 건너자 이불집 앞 평상에서 할머니들이 올챙이 국수에 조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메밀 파전을 뇌물로 삼아 할머니들과 합석했다. 할머니들은 이웃 동네에서 장 보러 타박타박 나왔다가 동무들을 만난 것이다. 장날에만 맛볼수 있는 올챙이 국수를 먹고 방터를 빠져 나왔다.
이효석 생가(生家)로 가는 길에는 가산공원과 물레방앗간이 줄지어 나타난다. 이효석의 호를 딴 가산(可山) 공원은 선생의 흉상이 서 있고, 주변에는 키 큰 느릌나무가 운치있게 둘러쳐져 있다. 남안교를 건너면 물레방앗간이다. 이곳은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달빛에 취해 일합(一合)을 나눈 곳이다. 물레방아는 본래 홍정천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이효석은 봉평에 살았던 실존인물들을 모델로 하여'메밀꽃 필 무렵'을 창조해 냈다.
생가(生家)로 가는길
허생원과 조선달, 충주집과 성서방네 처녀 모두 봉평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얽둑배기(곰보)'이기 하지만 건장한 사내였던 허생원은 충주집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우연히 성서방네 처녀와 물레방앗간에서 관계를 맺는다. 그후 성서방네 처녀 일가(一家)는 제천쪽으로 떠나가 된다. 이효석은 이러한 싱거운 이야기에 시적(詩的) 서정을 가미하여 멋뜨러진 러브스토리로 만든 것이다. 이효석 생가까지는 도록 깔려 있지만, 도로 옆 농로를 따라 걷는 것이 제맛이다.
눈을 꽉 감은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메밀들과 옥수수 잎사귀가 정겨운 들길이다. 생가는 현제 홍종을씨 가족이 메밀 농사와 식당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 홍씨는 생가 옆에 흙집으로 식당 건물을 세워 손님들을 맞고 있다. 툇마루에 앉아 마당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엄나무를 쳐다보며 이효석을 생각한다.
사실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네 살 때 봉평을 떠낚기 때문에 그에게는 눅진한 고향의 기억이 없었다. 또한 그의 사상과 취미는 온통 도시적이며 서구적인 것에 메몰되어 있었다. 효석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방황하는 영혼이었던 것이다.
노루목과 여울목
'메밀꽃 필 무렵'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은 노루목 고개에서 탄생한다. 이 고개는 봉평과 장평 사이에 위치하고, 대화를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한다. 허생원 일행은 달빛을 밟으며 메밀꽃 흐트러진 노루목을 넘는다. 이 서늘한 아름다움! 그러나 이 고개는 영동고속도로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됐다. 남은 것은 5분이면 오를 수 있는 작은 고개뿐. 발목을 붙드는 잡풀을 해치고 고갯마루에 오르니, 차량 소음이 진동한다. 고개를 내려가면 고속도로를 만나게 된다.
다시 고개 입구로 내려와 여울목으로 향한다. 여울목은 노루목 기념비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개울이다. 이곳에서 허생원은 동이가 자신의 자식임을 확인한다. 개울은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지만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개울 건너 청정한 방울 소리를 올리며 나란히 걷고 있는 허생원, 조선달, 동이의 모습이 아련하게 보인다. 어지간히 기우러진 달이 세 사람의 등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건너편 도로로 관광버스가 지나가자, 세 사람의 환영(幻影)도 사라져 버렸다.<글 진우석 기자 사진 장병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