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기행

문학기행/청량산

달빛그림자 2009. 12. 11. 00:54
 

 
문학예술산행
▒ 퇴계 이황과 청량산
▒ 퇴계가 청량산을 나와 도산으로 간 까닭은…

오죽 청량산(淸凉山 870m)이 그리웠으면 퇴계는 자신의 별호를 ‘청량산인(淸凉山人)’으로 지었을까. 1555년 겨울, 50대 중반인 퇴계는 수십 년만에 청량산을 찾았다. 그 때 청량산에 큰 눈이 내렸다고 한다. 눈 쌓인 태초의 신비 속에서 퇴계는 한달 여를 머물렀다.

그리고 <11월에 청량산으로 들어가다>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서 ‘저 하늘에 꽂힌 재에 올라 우주를 두 눈으로 다 보고 싶다’고 했다. 산을 내려온 후, 퇴계는 자신의 호를 아예 ‘청량산인’으로 바꾸었다. 점점 늙어갈수록 청량산이 새록새록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마침 제자 금응협이 <청량산>이란 시를 지어 보내오자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했다.

신선의 산 올해 그대 홀로 찾아가고, 내 짚신은 한가롭네. 병이 쳐들어 와서. 헛되이 좋은 글귀 읊조리나 놀만 눈앞에 아른거리고, 높은 대 우러러 생각하나 달빛만 옷깃에 가득하네. 굳센 뜻은 구름을 갖다 바치지 않으려는데, 글 읽으며 오직 견주네. 학이 참된 마음 알아주기를. 정녕코 잘 있게나, 광산의 빼어난 경치여. 머리 희어졌지만 오르려네. 봉우리 가장 높은 곳까지.

<진산 금응협이 지은 청량산 시의 각운자에 맞추어> 이 작품만큼 청량산에 대한 퇴계의 애정이 구구절절 배어나는 시가 또 있을까. 산으로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내 짚신은 한가롭다’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자꾸만 떠오르는 청량산을 잊으려 좋은 글을 읽어보지만 헛수고다. 아예 밖으로 나와 눈을 감고 청량산 12봉을 생각하다 눈을 떠보니, 산은 간 데 없고 달빛뿐이다.

마지막 연은 다시 청량산을 오르겠다는 다짐과 학문에 있어서도 그 정점에 서보겠다는 의지, 양자로 읽힌다. 퇴계는 10년 뒤 제자들과 다시 청량산을 유람한다. 머리가 희어졌지만 기어코 청량산을 오른 것이다. 그리고 학문의 세계에서도 역시 가장 꼭대기로 오르게 된다. 산의 계보에 따르면 청량산은 백두대간에서 세 번 가지

치기를 해야 나타나는 산이다. 백두대간 태백산에서 갈라져 낙동정맥으로, 다시 낙동정맥 백암산에서 굽이쳐 일월산으로, 마침내 일월산에서 청량으로 이어진다. 산이 있으면 강이 있는 법.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때깔로 청량산의 왼쪽 옆구리를 적시며 흘러간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원효와 의상이 청량사를 건립하면서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또 최치원이 신선처럼 소요했고, 김생은 굴속에 처박혀 문장을 가다듬었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몸을 숨겼다. 그리고 1515년 마침내 퇴계가 찾아든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그의 출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퇴계는 청량산 남서쪽 줄기가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 예안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퇴계는 청량산에 탯줄을 빌린 셈이고, 훗날 청량산은 퇴계로 인해 더욱 큰 이름을 얻는다.

청량산에 대한 사랑과 배신

퇴계는 15세 무렵인 1515년경 숙부와 형을 모시고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청량과 첫 대면하게 된다. 그 때에 벌써 청량산을 자기 산으로 ‘찜’해 놓았던 것이다. 그가 일생동안 청량산을 노래한 시가 무려 50편이 넘는다.

짧은 벼슬살이를 마친 말년의 퇴계는 자연을 벗삼은 아담한 공간을 마련해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것을 실현한 장소가 그 유명한 도산서원이다. 문제는 ‘청량서당’이 아니라 ‘도산서당’이라는데 있다. 왜 퇴계는 그토록 사랑하던 청량산을 버리고 도산에다 서당을 지었을까.

청량산의 영역 100리는 남북으로 달걀과 같은 형세라, 산의 진면목을 보려면 무조건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조선후기 최고의 인문지리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묏부리 두어 송이 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에 석벽이 만 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은 그러한 맥락이다.

또한 퇴계는 「백운암기」에서 ‘청량산은 전체가 벼랑과 돌들이 발기(勃起)하여 흙을 이고 층을 이루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청량산은 그 입구부터 극적이다. 옛날에 청량산을 가려면 광석나루에서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배 안에 올라 갓 끈을 벗어 땀을 닦던 퇴계는 강물에 흔들리며 얼마나 설레었을까. 매표소를 지나 계곡을 따라 걷다, 왼쪽으로 청량사 가는 등산로 연둣빛 숲에 몸을 숨긴다. 길은 산비탈을 에돌아가는 상쾌한 에움길이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예사롭지 않은 바위들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금탑봉의 기이한 기암괴석들이 산행 초장부터 얼을 빼놓는다.

절벽으로 떨어질세라 편마암 바위에 바투 붙어있는 것이 ‘외청량사’라고도 불리는 응진전(應眞殿)이다. 이곳 풍치에 넋을 홀딱 뺏겨서는 안 된다. 모퉁이 돌면 청량산 최고의 전망대 어풍대(御風臺)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풍대에 서면 탄성이 먼저 터진다. 틀림없이 이러한 풍경을 보고 퇴계는 ‘신선의 산’,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로다’라는 시구를 썼을 것이다. 이곳에서 보면 청량사는 연꽃처럼 펼쳐진 청량산 12봉을 배경으로 절은 꽃술자리에 포근히 안겨있다. 청량산 12봉의 모든 기운이 청량사로 수렴되는 기똥찬 자리다.

3명의 청량산인

청량산 12봉 꽃술자리에는 모두 세 채의 집이 자리잡고 있다. 퇴계가 머물렀던 장소에 제자들이 세운 ‘청량정사(오산당·吾山堂)’, 이대실씨의 ‘산꾼의 집’, 그리고 지현 스님의 ‘청량사’가 그것이다. 이대실씨는 중학교 3학년 때 산과 절에 반해 이곳의 스님이 되고자 했으나, 당시 비구니 스님에게 호되게 쫓겨났다고 한다.

속으로 ‘언젠가 이 산에서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 지금의 ‘청량산인’이 된 것이다. 이대실씨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귀한 한약차를 거저 준다. 그는 여러 차례 해외원정도 다녀온 베테랑 산꾼이다. 산에 들어와 대금도 불고, 그림도 그리고, 도자기도 굽고, 매일매일 신선처럼 살고 있다. 한번은 금탑봉 벼랑에서 추락, 벼랑 중간에 매달린 아이를 구조했다.

고맙다고 사례비를 건네는 부모에게 이씨는 “아이가 다칠 뻔했다고 청량산을 미워하지 마십시오”라는 말만을 남겼을 뿐이다. 또 한 명의 ‘청량산인’은 청량사 주지인 지현 스님이다. 10여 년 전 스님이 절에 왔을 때, 절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스님 표현을 빌리면 “부처가 비를 맞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스님은 하루 두 차례 3시간을 걸어 강나루로 나가 자재를 지게로 날랐고, 아낙들이 고추를 보시하면 30리를 걸어가 장에서 쌀로 바꾸어 끼니를 때우며 일했다고 한다. 스님이 청량사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세운 찻집, 안심당 안에는 예쁜 전통 연등들이 은은한 불을 밝히고 있다. 주마등(走馬燈), 학등, 거북등, 원앙등…. 모두 스님이 직접 만든 것이다. 또 찻집 앞에는 스님이 지은 시가 나무에 새겨져 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의 눈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연기 가늘게 피어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자는 의미에서 지었다는 이 시를 읊조리며 의상봉으로 가는 길은 ‘지친 다리가 험한 길을 만나면’이었다. 길은 거대한 암봉들이 막아 능선을 탈 수 없기 때문에 급경사의 내리막 오르막을 반복해야 한다.

그는 진정 청량산을 사랑했다

의상봉 바로 아래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산과 산을 좌우로 거느리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을 만날 수 있다. 멀리 도산쪽을 바라보며 퇴계가 왜 청량산을 버리고 도산으로 갔는지 다시금 생각해 본다. 퇴계는 청량산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많이 걸린 모양이다. 「도산기(陶山記)」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들고 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옛 사람으로 산을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이름 난 산을 얻어서 스스로 의탁하였거늘, 이제 그대는 청량산에 살지 않고 여기(도산서당)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청량산은 깎아지를 듯이 만 길을 서 있고 위태로운 만큼 늙고 병든 이의 편안히 살 곳이 못된다.

또 요산요수는 하나도 빠져도 안 되는데, 지금 낙천(낙동강)은 비록 청량산을 지나오지만 산 속에서는 물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나는 본래 청량산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곳을 뒤로하고 이곳을 먼저 하는 것은, 산과 물을 겸하여 늙고 병든 이에게 편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퇴계는 진정으로 청량산에서 살기를 원했다.

도산이 산과 물을 겸하고, 늙고 병든 자기가 살기 편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퇴계는 공자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한 유학자였다. 유학자들이 바라보는 자연관에 의하면, 아름다운 자연이란 도의를 기뻐하고 심을 기르는 방편일 뿐이다. 도가(道家) 사람들처럼 자연에 몰입, 나를 잊어버리는 경지까지 나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퇴계는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한 평생을 학문의 구도자(求道者)로 살아온 자신이 청량산 육육봉의 신선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만약 퇴계가 청량산에 계속 머물렀다면 공자와 주자 그리고 퇴계로 이어지는 유학의 적통(嫡統) 퇴계학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퇴계가 진정으로 가장 사랑한 산은 청량산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청량산을 떠났기에 동방의 거대한 산으로 우뚝 솟게 된다. 도산에 머무르지만 청량산을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청량산인’으로 부르는 퇴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글|진우석 사진|안찬호 기자>

청량산의 기운은 모두 청량사로 집중되어 있어서 절 부근이 느낌도 풍경도 좋다. 따라서 청량사를 중심으로 두 가지 산행 코스를 생각할 수 있다. 청량산 정상인 의상봉을 염두에 둔다면 응진전∼어풍대∼김생굴∼청량사∼의상봉∼두덕마을 코스가 적당하다. 청량사를 둘러싼 봉우리들에 끌린다면 위 코스 김생굴에서 보살봉∼자소봉∼청량사로 둘러보는 것이 좋다.

청량사에서 의상봉까지 거리는 2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2시간 30분 걸린다. 암봉에 막혀 능선을 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급경사의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해야 한다. 청량사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매표소를 지나 걸어서 15분 거리에 왼편으로 시멘트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은 팍팍하고 재미없다. 계곡에서 5분 더 가서 역시 왼편으로 청량사 가는 등산로를 택한다.

이 길에서 20분 거리인 응진전까지 수려한 에움길이다. 금탑봉을 배경의 응진전에서 반만 넋을 잃자. 나머지는 어풍대에서 써야한다. 어풍대는 최지원이 즐겨 마셨다는 총명수를 지나면 나오는데, 청량사 최고의 전망대다. 이곳에서 잠시 신선이 되어 보자. 청량사 경내에서는 공민왕의 친필이라 전해지는 ‘유리보전’ 현판 글씨, 종이를 녹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불, ‘삼각우총’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소나무 등을 눈여겨보자. ‘청량산인’ 이대실씨와 지현 스님을 만나면 좋은 인연이 될 것이다.

책과 인터넷 싸이트 「국역 퇴계시 1, 2」, 정신문화연구원/「퇴계전서」, 퇴계학연구원: 두 책은 퇴계에 대한 1차 자료로 국회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다시 도산 매화를 찾아서」, 창작과비평사: 퇴계의 주요 한시를 뽑았는데, 청량산에 관한 시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흠이다. http://www-2.kyungpook.ac.kr/~toegye/archive/archive.htm: 경북대 퇴계연구소에서 올린 퇴계학 논총 10권의 내용이 전부 들어있다. 퇴계의 모든 분야에 관한 논문과 자료를 볼 수 있다.

가볼 만한 데

도산서원 청량산과 20리 떨어져 있다. 퇴계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기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꿈이었다. 도산서원은 그의 꿈을 실현해 놓은 공간이다. 퇴계는 청량산과 도산을 놓고 끝까지 저울질하다 결국 1561년, 그의 나이 61세에 도산서당을 완성했다. 그 당시 서당은 퇴계가 기거하던 세 칸 초가집과 강의실 농월정사가 전부였다. 지금의 많은 건물들은 퇴계 사후 지어졌고, 서당은 서원으로 격상됐다.

영주 무섬 영주시 수도리는 무섬으로 불려진다. 이곳은 내성천과 서천이 합류, 크게 반원을 그리면서 마을을 섬으로 만들었다. 뭍에서 마을로 통하는 길은 30년 전에 만들어진 시멘트 다리 하나뿐이다. 해수욕장처럼 드넓은 강변 모래사장과 한옥 고택들이 볼 만하다. 시인 조지훈의 처가가 이곳에 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시인은 자주 이곳에 들러 시심을 다잡았다고 한다. 영주에서 5번 국도를 타고 가다, 쓰레기처리장쪽으로 우회전, 월호리쪽으로 우회전, 문수초등학교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부석사 아직도 부석사를 가보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가 좋다. 답사 전문가들인 최순우, 유홍준 선생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곳이라 표현한 곳이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장쾌한 백두대간 줄기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 안내도
장소에 따라 영주, 안동, 봉화를 기점으로 한다. 서울은 동서울터미널(☎02-446-8000)에서 수시로 있는 영주행 버스를 탄다. 영주∼봉화∼청량산. 자가용은 중앙고속도를 이용하여 서제천 나들목∼제천∼단양∼영주∼봉화∼918 지방도∼청량산. 도산서원을 먼저 들렀다가 청량산으로 가려면 영주∼5번 국도∼옛고개 휴게소에서 좌회전∼915, 999 지방도∼35번 국도∼도산서원∼청량산. 특히 915, 999 지방도는 5월초가 되면 사과꽃이 만개한다. 봉화와 안동에서는 청량산행 버스가 수시로 있다.

숙소는 청량산 깊은 곳에 자리잡은 청량산휴게소(대표 박낙봉 ☎054-672-1447)가 무난하다. 식사로 토종닭과 백반을 먹을 수 있다. 한편 봉화에서 청량산으로 가는 길에는 봉성마을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전승된 이곳 숯불암퇘지구이는 소나무숯에 구워내 전혀 고기 냄새가 나지 않는다. 20곳이 넘게 영업을 하지만 그 중 오시오식당(대표 여화자 ☎672-9012)이 대표적이다. 고기 맛도 좋지만 ‘손님이 많지만 인심이 후해 돈은 못 벌었다’는 말처럼 주인아주머니의 인심이 후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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