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4일 성공적으로 끝난 남북정상회담은 분단 50년만에 이룩한 민족적 쾌거였다. 그것은 분단과 전쟁, 불신과 비방으로 얼룩졌던 한반도에 찾아온 평화통일의 메시지였다. 회담은 즉각적으로 남한 사회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80년대 운동권에서 주장했던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공개적으로 일어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한 시민들에게 화려하게(?) 데뷰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찬양'과 '이적표현물 제작' 등 현재 개정논의중인 독소 조항들은 폐지될 전망이다. 이번 회담으로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反共主義)'라는 이데올로기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수립 이후 '민족주의'가 국가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면, 한국전쟁 이후에는 '반공주의'가 그 위치에 놓이게된다. 전쟁은 사회 성원들에게 '냉전적 세계관'을 내면화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5.16군사쿠데타를 거친 반공주의는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강인철 교수의 지적은 타당하다. ('창작과 비평'2000년 여름호) 소설'태백산맥'은 1983년에 첫 연재가 시작되어 1989년 10월 10권이 완간됐다.
남한의 반공주의는 뒤늦게 '태백산맥'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91년 대검에서는 소설이 운동권의 교과서로 쓰인다며 국가보안법 이적성 여부를 내사했다가 문제삼지 않기로 해꼬, 94년에는 여러 기관단체장들이 조정래씨를 국가보안법 위반과 명예훼손죄로 고발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태백산맥'은 사회적으로 뿌리깊은 반공주의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었고, 문학사적으로 분단문학을 넘어 통일문학을 지향하는 밑거름이었다. '태백산맥'의 주무대는 전남 '벌교(筏橋)'라는 소읍이다.
벌교는 골목 구석구석까지 소설의 무대로 알뜰하게 쓰였다. 그러나 벌교의 중요성은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단의 유수한 평론가들은 '벌교의 사상'(김윤식), '상상력의 집중'(권영민)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벌교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문학예술산행은 벌교와 염상진이 해방구로 장악했던 율어, 그리고 빨치산 최후의 피난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일정으로 짜여졌다. 그리고 지리산 세석에 올라 고정희의 시집[지리산의 봄]을 읊조리는 것으로. 벌교(筏橋)는 뗏목으로 만든 다리라는 뜻, 그러니까 포구라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먼저 중도 방죽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다. 벌교의 역사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대무닝다.
방죽 길로 나가려면 철교 건널목을 지나야 한다. 철교는 아담한 포구 위에 놓인 숏다리 다리다. 이곳은 염상구가 깡패 오야봉 자리를 놓고 경쟁자와 담력을 겨루면서 뛰어내린 곳이기도 하다. 건널목을 지나면 바다로 나가는 방죽 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방죽을 사이로 두고 뻘과 드넓은 논이 마주보고 있다. 저 논은 벌교의 뭇 농투성이들이 온몸으로 바다를 막아 만든 것이다. 아, 민초(民草)들의 위대함이여! 이러한 대규모 간척 사업을 벌인 것은 일본인 지주 중도였다. 중도는 노임을 따로 지불하고 공사가 끝나면 소작논을 우선적으로 배당한다고 농민들을 꼬드겼다.
염상진의 아비와 하대치의 할아비도 중도의 꼬임에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싿. 벌교읍사무소 이필교 총무계장에 의하면 중도의 후예들이 올 8월 벌교를 찾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것도 옛 조상의 향수에 푹 젖은 채. 끔찍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방죽을 나와 벌교 시외버스터미널과 주유소 사이의 소로(小路)를 10분쯤 올랐다. 이곳에 중도가 살았다는 현부자집 제각(祭閣)이 있는데, 소설에서는 무당 소화가 살던 집이다. 소화는 이 집에서 양조장 사장의 아들이며 좌익사상에 물든 서울유학생 정하섭과 운명적 만남을 가진 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태백산맥]이 시작된다. 집은 흉가였다. 오만한 솟을대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집앞으로 인공 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허물어진 담벼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산발한 나무들 사이로 국적 불명의 건물이 음산한 기운을 뿜어낸다.
[태백산맥]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종결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어 휴전 직후까지 오 년간의 시간을 담고 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부터 해방 직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대사의 격동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작가의 신선한 역사의식이었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작가는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격동기를 '소작쟁의'라는 내전(內戰)의 형식, 즉 계층갈등의 소산으로 파악하고 있다. 벌교 답사의 매력은 작가의 역사 의식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멘트로 만든 소화교는 본래 부용교(芙蓉僑)란 예쁜 이름이었으나, 일제가 소화년에 만들었다고 그렇게 불렀다. 이 다리는 실제로 우익이 좌익을, 좌익이 우익을 처형했던 장소였다.
해방구 율어
다리 밑은 수많은 시체들 즐비햇고, 물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고 소설은 적고 있다. 부용교는 원래 다리 옆에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를 덧붙여 놓았다. 그래서 인도와 차도 크기가 비슷하다. 학교를 파한 아이들과, 아낙들이 지나 다니는 모습이 평화롭다. 벌교의 야산(野山) 부용산을 오른다. 이곳은 벌교 계엄 사령관 심재모가 'MI 고지'로 부르기도 했다. 산 중턱에는 아담한 부용정이 놓여있다.
정자에 서면 시야가 뻥 뚫린다. 벌교 시내와 중도 방죽 너머 바다까지, 그리고 반대편에는 제석산 아래로 고읍들과 낙악벨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안치환 뺨치게 노래하는 서준영 기자를 졸랐다. 이곳 부용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노래 '부용산'을 들려달라고. 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특유의 저음(低音)을 뽑아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 노래는 벌교에서 학교 선생을 했었던 박기동씨의 시(詩)다. 그는 죽은 누이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시를 썼다고 한다. 이 시는 월북 작곡가 안성현에 의해 노래로 태어났다. 그러나 작곡자가 월북한 관계로 한동안 금지곡이 되었다
벌교 답사를 마치면 율어를 찾아야 한다. 보성군과 벌교읍에 양다리를 걸친 율어면은 초암산(576m)의 호남정맥과 그 지맥으로 돌러싸인 천연의 요새다. 작가는 율어의 지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만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줄기를 뻗고, 그 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지리산-빨치산의 고향 그리고 무덤
그건 산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강강수월래 춤이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을 받아올리고자 하는 산들의 어깨동무였다. 산들은 신비스러울 만치 확연한 동그라밀 그려내고는 그 안쪽에다 평평한 땅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그 전체적인 모양은 거대한 사발이었다.
어쩌면 조물주가 물사발로 한번 쓰고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순반란사건 후 벌교를 장악했던 염상진 부대는 군경토벌대에 쫓겨 존제산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장기 투쟁을 위해 율어를 해방구로 장악하고 군경과 대치하게 된다. 우리는 염상진이 그랬던 것처럼 존제산에 올라 율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었다.
율어의 관문 격인 주릿재에서 오르막 능선에 붙었다. 그러나 존제산은 군부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구름이 몰려들어 율어는 보이지 않아싿. 다시 주릿재로 내려오니 아쉬운데로 율어의 산세를 감상할 수 있었다.
지리산은 빨치산 최후의 피난처이자 그돌으 무덤이 된 곳이다. 우리는 거림골을 겨냥하고 차를 몰았다. 빨치산들이라면 호남정맥을 타고 조계산을 지나 백운산, 그리고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으로 들어갔지만. 세석에 섰다. 유독 지리산을 좋아하던 시인 고정희는 85년 봄 세석고원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3박 4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 중이었다. 세석 주변에 만개한 철쭉들이 그녀의 시심(時心)을 건드렸을 것이다. 이 시에서 산맥은 우리의 역사로 비유된다.
시인이 파악하는 그 역사는 죽음과 절망의 역사다. 시적 화지는 칼과 그리움을 품고 절망의 역사를 넘어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철쭉꽃의 상징은 무엇일까. 빨치산들이 아니겠는가. 빨치산들의 피를 먹고 자란 철쭉은 유독 붉다고 하지 않던가. 고정희는 1991년 6월 장마를 무릎쓰고 뱀사골을 등반하다가 실족하고 만다. 그토록 좋아하던 지리산과 영원히 몸을 섞은 것이다. 43세, 아직 그녀는 미혼이었다.
지리산은 빨치산을 빼고는 존재할 수 없는 산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빨치산들만 해도 수만 명을 헤아린다. 이제 더 이상 반공주의의 시각에서 그들을 '빨갱이'나 '공비'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 역시 격동의 근대사 속에서 희생된 피 끓는 청춘들이 아니었겠는가. <글 진우석 기자 사진 서준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