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錦山)을 알기 전에 이성복의 시집 「남해 금산」을 먼저 만났다. 1980년대 문학의 역병을 앓아본 사람들에게 이성복은 신화 그 자체였다. 바슐라르, 카프카 등의 영향을 받은 불문학도 이성복은 1977년 등단하여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발표한다.
기존의 시적 문법을 파괴하는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이 충만한 이 시집은, 이성복에게 1980년 ‘김수영문학상’ 을 안겨줬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이 「남해금산」이다. 시집의 표제작 ‘남해 금산’은 예전에 금산에서 칡차를 파는 젊은 행상이 리어카에 써 붙였다고 한다. 그만큼 유명한 시다. 내 정신 속의 남해 금산은 ‘남’ 자와 ‘금’ 자의 그 부드러운 ‘ㅁ’ 의 음소로 존재한다.
모든 어머니와 물과 무너짐과 무두질과 … 그 영원한 모성의 ‘ㅁ’을 가지고 있는 남해의 ‘ㄴ’ 과 금산의 ‘ㄱ’ 은 각기 바다의 유동성과 산의 날카로움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해 금산을 ‘물과 흙의 혼례‘ 로 규정한 이성복의 산문을 보고 나는 또 얼마나 설레었던가. 금산에 가보지 않았어도, 날카로운 기암괴석들로 수놓아진 산의 모습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성복을 알게된 이후, 1971년에 발표된 서정인의 단편소설 「산」의 무대가 남해 금산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소설에서는 금산이 ‘덕산’, 상주가 ‘항주’ 라는 가명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 국문소설의 역작 「구운몽」이 남해금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노도(櫓島)에서 탄생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번 산행은 서정인과 이성복의 시선으로 남해금산을 바라보는 문학예술산행으로 계획됐다. 그리고 노도를 찾아 서포 김만중에 대해 헤아려보는 것도. 19번 국도가 지나가는 상주리 금산매표소 앞은 인적이 뜸하다. 매표소 청년에게 물어보니 우리 앞에 딱 한 명 올라갔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금산 북쪽 복곡에서 보리암 근처까지 비포장도로가 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차편을 이용한다. 마침 매표소로 올라오는 나이 지긋한 부부가 있어 동행을 청했다.
서정인의 남해금산- 상처의 산
20분쯤 걸어 ‘도선바위’ 에서 쉬었다. 이용구(60세), 문정순씨(53세) 부부는 경기도 안양에 산다고 했다. 나이든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산행하는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서정인의 단편소설 「산」에 나오는 주인공 건오와 여자를 떠올렸다. 우리가 걷는 이 등산로를 통해 소설의 주인공들도 금산에 올랐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섬 학교의 교사로 부임하는 건오는 상주(소설에는 항주)로 가는 연락선 속에서 아이를 데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중간 기항지인 홍현에서 내리고 남자는 상주로 가서 교사로 부임한다. 건오는 포구를 드나드는 연락선을 바라보며 여자를 그리워한다. 어느 날 그녀가 항주에 나타나고, 두 사람은 금산(소설에는 덕산)을 오른다.
날이 저물고 두 사람은 산정 여관에 드는데, 여자는 건오에게 자신의 과거를 얘기한다. 그녀는 석달 전까지 뭍의 어느 초등학교 철없는 교사였다. 그때 그녀가 하숙했던 곳이 바로 건오 학교의 문교감 집이었다. 교감은 그녀의 초등학교 은사로 그녀가 선생이 될 수 있도록 돌봐준 사람이다. 그러나 교감은 그녀를 성폭행 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길로 하산한다. 건오는 올라왔던 길인 상주로, 그녀는 금산 북쪽인 복곡으로. "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는 남해 금산은 삶에서 상처받은 인간들을 치유해주는 그런 아름다운 자연이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들의 상처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자연이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 …그 길이 갑자기 뱀처럼 몸을 틀고 송림을 피해서 사라져 버렸다. 그는 모래밭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육백육십육 미터의 산이 성큼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저 앞으로 손기정 옹이 올림픽을 제패하고 받았던 그리스 투구 모양을 한 바위가 나타났다. 쌍홍문이다. 쌍홍문 속을 지나 보리암에 도착한다. 보리암은 전국에서 기도발이 잘 듣기로 소문난 암자 중에 하나다. 금산. 비단산이라는 이름은 이성계와 관계된 전설을 갖고 있다. 이성계는 보리암에서 백일 기도를 올렸다. 혁명에 성공한다면 그 보답으로 산을 비단으로 두르겠다고. 조선이 건국되자 약속대로 이성계는 산을 비단으로 덮으라는 영을 내렸는데, 신하들이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름을 바꾸자는 상소문을 올린다.
결국 산은 보광산(寶光山)에서 금산(錦山)으로 이름이 바꼈다. 위 전설은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권력의 힘이다. 사물(事物)의 핵심이 그 이름에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이 강조하는 말이다. 권력은 사물의 이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힘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민중들의 요청이다.
그들은 산의 아름다움, 보리암의 영험을 강력하게 바쳐줄 수 있는 신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국 각 지방에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번잡한 보리암을 지나 금산 정상인 망월대에 오른다. 봉수대가 잘 보존된 이곳은 이름처럼 달빛 밝은 날에 좋을 듯 싶다. 우리는 금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상사바위로 향했다.
이곳은 망월대에서 남서 방향으로 15분 걸린다. 상사바위는 금산 최고의 전망대다. 남쪽으로 바다를 향해 입 벌린 항아리 모양을 한 상주해수욕장이 아련하게 들어오고, 동쪽으로 보리암 주변의 기암괴석들이 역동적이다. 멀리 서쪽으로는 벽련(碧蓮)과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가 아른거린다.
이성복의 남해금산- 실연(失戀)의 산
금산은 그 이름에서 촉발되는 상상력을 벗어나서 생각하기 힘들다. 바다를 향해 일어선 수많은 기암들과 다도해 쪽빛 바다의 아스라함! 그러나 이성복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금산과 이성계의 신화는 통렬하게 부서져 버린다. 신화는 새로운 신화에 의해 무너지기 마련이다.
"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금산은 실연(失戀)의 산이다. 바다를 향해 일어선 기암괴석들은 여인이 떠나가 버린 빈 껍데기의 바위들에 불과하다. 7행의 짧은 시가 금산이 갖는 기존의 통념들을 부셔버린 것이다. 상사바위에 앉아 바라보는 상주해수욕장 곡선은 사람의 시선을 가두는 힘이 있었다. 그 곡선은 마치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항아리 모양이다.
그 곡선이 내가 앉은 상사바위를 끌어당기는지, 나는 점점 항아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돌과 물의 혼례‘를 떠올리는 다분히 관능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돌 속에서 떠나간 ‘그 여자’ 는 항아리 모양의 바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 동안 동행하던 노부부는 광양에 들러 매화꽃 구경을 한다면서 작별을 고한다. 그들은 올라왔던 상주리 쪽으로 다시 내려갔다. 우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왠지 그들과 같이 내려가지 못한 것이 내심 찜찜하다.
“ …그는 그가 분명히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이 올라갔으니 같이 내려와야 할 것이 아니냐”
소설의 주인공 건오가 하산하여 느닷없이 깨달은 외침이 귓가에서 어른거렸기 때문이리라. 벽련(碧蓮). 푸른 연꽃 마을은 연꽃 대신 파릇파릇한 마늘밭이 봄을 알리고 있었다. 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다. 배를 타는 것에 우리는 다소 들떠 있었지만, 그 옛날 멀리 남해로 귀향 와 다시 배를 타고 노도를 들어가는 김만중의 심정은 괴로웠을 것이다.
더욱이 김만중은 정치적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었기에. 그는 서인의 우두머리로 남인의 거두 윤선도를 탄핵한다. 한량 기질이 다분한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유유자적 왕처럼 살았다. 반면 김만중은 노도에서 ‘노자묵고 할배’ 로 통했다. 일은 안하고 놀고먹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는 숙종이 다시 부르기만을 학수 고대했지만, 한양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김만중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구운몽」을 집필했다. 이 작품은 허균의 「홍길동전」과 더불어 국문학사에 으뜸으로 친다. 유배오지 않았다면 김만중은 결코 그 작품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죽어 섬을 떠났다.
노도는 15가구 사는데, 그 중 8명이 홀로 산다고 한다. 배에서 내리자 ‘서포 김만중선생 유적비’ 가 눈에 띈다. 아담한 섬에 비해 유적비는 너무 컸다. 김만중의 초가 터로 향한다. 섬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초가 터에는 집터를 알리는 기념비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남해군에서 김만중의 초가집을 복원해 놓았더라면 이렇게 황량하지는 않았을 것을. 풀숲에 주저앉아 멀리 남해 금산과 눈을 맞춰 본다. <글·진우석 기자 사진·서준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