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기행

박경리의 삶과 문학

달빛그림자 2009. 12. 14. 20:18

박경리의 삶과 문학

작가 박경리는 1927년 10월 28일 경남 충무 출생이다.
그녀의 출생은 불행했다.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잠재했던 불행의 자장 안으로 흘러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열네 살 때에 네 살 연상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한 결혼이나, 둘 사이의 애정은 그리 깊지 않은 듯하다. 유랑 생활을 자주 했고, 또 이곳 저곳에 가정을 꾸렸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한 셈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출생이 불합리했다고 표현한다.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 부모들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였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하여 타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적의에 찬 감정으로 일관했다. 어찌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미워한 여인에게 나를 낳게 했는가 싶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산신에게,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내게 다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 박아주고야 말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고독은 그녀를 조숙하게 만들었다.
사랑과 기쁨, 그리고 미래에의 꿈 대신에 증오와 경멸, 절망을 맛보아야 했다. 작가는 어린 나이에, 그것도 무의식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경멸한 셈이다.
가치관 등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터이다. 작가 박경리는 어린 나이에, 선이라는 담론에 담겨진 악의 모습을, 화려함 속에 깃들여진 어두움을 자연스러움 속의 부조화를, 제의 속에 가녀린 희생양을 보아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박경리는 아주 일찍부터 여성문제를 다루는 작가가 될 수 있었고, 이러한 관심은 그의 초기 작 「전도」에서부터『표류도』, 『김약국의 딸들』, 『파시』등의 성과로 산출된다.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하다. <여자가 공불 하면 뭣하나>라며 학비를 대주지 않은 아버지에 반발해 1년간을 집에서 쉬었고, 그리고 여고 시절을 마쳤다.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졌고, 작가의 모든 것을 휩쓸며 지나갔다. 불합리한 출생은 비극적인 생애의 서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박경리는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또 전쟁 직후에는 아들을 잃는다. 이런 고통은 불합리한 출생으로 생겨난 비극적 인식을 더욱 고착시켜 놓는다. 이 세상에 선이란 존재하지 않고, 결국 악이 승리한다는 절망을 경험한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운명 또는 숙명을 생각해야 했다.

이후 그의 소설을 풍부하게 하는 여러 요인이 또한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얻어졌으니, 이 때문에 흔히 소설가를 저주 받은 영혼이라 표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전쟁은 불합리한 출생과 더불어 박경리 문학의 질을 결정지은 중요한 경험내용에 속한다. 전쟁을 경험하면서, 불합리한 출생으로 인해 항상 내부로만 움츠러들던 작가의 시선이 외부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55년 8월, 박경리는 등단한다. 등단은 「계산」(『현대문학』, 55.8). 추천이 완료된 것은 다음해인 1956년이었다. 박경리는 「흑흑백백」(『현대문학』,56.8)으로 드디어 작가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박경리에게 문학과 삶은 쌍두아가 된다. 박경리의 삶은 이때부터 소설쓰기 그것만으로 채워진다

박경리는 4.19를 통해 비로소 고통의 뿌리를 찾는다. 개인적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찾자, 보다 분명한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삶이란 어떤 개인이 먼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같이 도달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확인한다.

드디어 1969년 8월부터 「토지」라는 우리 민족 문화를 응집, 축성한 말의 탑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 소재들은 1897년 추석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 한반도와 그 속에 살거나 살다가 쫓겨난 사람들의 생애에서 골라진 문화 내용들이다. 그리고 그 말의 탑 쌓기는 1994년 8월에 26년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현재 강원도 원주에 기념관을 짓고 여생(餘生)을 정리하는 것 같다.

토지는 일단 소설 자체가 지니는 의미가 남다르다.
한 작품을 26년 동안 연재한 경우가 한국소설사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니와, 게다가 작가는 토지연재를 시작하고 암 선고를 받는다. 삶과 문학을 토지로 기필코 완성하겠다는 의지로 모든 고난을 이겨낸 셈이다. 토지가 씌어진 만큼 한국소설사에는 의미 있는 전통이 만들어졌다고.

토지의 중요한 점은 소설 그 자체에 있다.
토지는 가족이라는 혈연 단위와 그 확대를 역사적인 시대의 교체와 맞물리도록 고안함으로써, 조선 말기 이후 한국사회의 근대화라는 격변기를 살아가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들의 창조에 성공하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리고 경남 방언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풍속 재현, 심리의 미묘한 곡절을 섬세하게 표현 능력, 군더더기 없는 정갈하고 담백한 문체를 정립함으로써 말장난이 뒤범벅된 문체를 마련하였다는 점 등이 토지의 중요한 의미를 둔다
대하소설 토지는 한(恨)이라는 정서에 몰두한다.
훼손된 것까지를 감싸 안는 순백의 삶으로 한국 여인네의 한을 찾은 것이다. 恨은 위대한 모성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지아비를 위해 아들을 위해 끝내 좌절하지 않았던 여인네들의 한을, 그는 이 훼손된 시대에 반드시 회복해야 할 인간적 덕목으로 설정한다.

박경리의 <불신시대>>, <시장과 전장>>, <<토지>> 등이 없는 한국 소설사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至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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