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섬진강’
말라붙은 가을 강이다. 속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 속에는 푸른 하늘과 알록달록한 산그림자가 잠기어 있다. 그 하늘과 산 위로 고기들은 유유히 날아다니며, 물낯을 씻는 늦가을 햇볕이 그들을 포근히 덮어 준다. 강가에는 형제 같은 느티나무 두 그루, 마을 앞 텃밭의 고춧대 위에는 황적색 딱새 한 마리, 잎 진 감나무 가지에는 까치밥 두엇이 꽂힌 듯 매달려 있다. 한살이를 마감한 논에는 효수당한 농민군 같은 볏단들이 서거나 누워 있고, 앞뒷산에는 붉나무를 필두로 한 가을 나무들이 저마다 누렇고 붉은 잎사귀를 상처처럼 혹은 훈장처럼 거느리고 서 있다. 고적한듯 화려한 그 풍경은 아랑곳없다는 듯 공중에는 까치가, 땅 위로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간다. 이곳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 진메마을.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48)씨의 둥지다.
ꡒ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준다ꡓ(`섬진강 1' 앞부분).
전주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50㎞를 짚어 내려가면 갈담이라고도 부르는 임실군 강진면 소재지에 이르고, 거기서 같은 길을 10리 가량 더 가면 나오는 곳이 덕치면이다. 앞산이 좌우로 길다랗다 해서 `긴뫼(長山)'라 이름붙여졌으나 우리네 이름이 항용 그러하듯 ‘진메'로 통용되고 있는 섬진강변의 작은 마을이 시인의 고향이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서발원해 경남 하동 포구로 몸을 푸는 섬진강 5백리 물길을 두고 보자면 진메는 강의 중상류쯤에 해당한다. 그 조금 위쪽 강진면 옥정리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섬진댐이 물을 막고 있어 댐 아래로는 수량이 매우 적다.
ꡒ아가/새아가/강 건너 저 밭을 봐라/저게 저렇게 하찮게 생겼어도/저게 나다/저 밭이 내 평생이니라/저 밭에/내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과/곡식 무성함의 기쁨과 설레임과/내 손톱 발톱이 범벅되어 있느니라ꡓ(`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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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덕치초등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던 김용택씨가 시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1982년이었다. 82년이라면 5월 광주의 충격과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무렵이다. 미증유의 학살극은 사회 전체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고, 복 없는 백성들은 애꿎은 소주병이나 작살낼 따름이었다. 그러나, 바닷가 가파른 벼랑 위에도 원추리꽃 한 송이가 피어 있듯이 숨막히는 역사의 격랑 속에도 서정의 몫은 엄연히 있었음인가. 김용택씨의 섬진강 시편들은 시대의 불인두에 데인 화인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며 삶이란, 그리고 역사란 한 판 승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낮은 목소리로.
ꡒ이 세상/우리 사는 일이/저물 일 하나 없이/팍팍할 때/저무는 강변으로 가/이 세상을 실어 오고 실어 가는/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팍팍한 마음 한끝을/저무는 강물에 적셔/풀어 보낼 일이다.ꡓ(`섬진강 5―삶')
김용택씨의 서정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방관적인 여느 `순수서정'과는 구분된다. 김용택씨는 그가 몸 담고 있는 농촌의 현실,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적 상황, 그것들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라는 큰 흐름에 두루 주목하면서 서정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감싸려 한다. 그의 시에서 서정과 역사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농촌의 현실에 발 붙이고 농민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농민시의 계보에 속한다. 1985년에 초판이 나온 그의 첫 시집 <섬진강>은 그보다 10여년 전에 출간된 선배 시인 신경림씨의 <농무>를 잇는 농민시의 80년대적 적자라 할 만하다. <섬진강>에 실린 시 `눈길'은 신경림씨의 같은 제목의 시를 연상시키며 두 시인 사이의 영향관계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ꡒ어떻게 할 것인가, 이 전답들을/어떻게 갚아갈 것인가, 겁도 안 나는 이 많은 빚을/걸을수록 발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들판 끝 자욱한 동네 감빛 같은/불빛을 따라/팍팍한 눈길을 걷는다ꡓ
서정이라고는 하지만, 농촌과 농민 현실의 팍팍함을 고발하는 시인의 어조가 마냥 가라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다. 80년대에 특히 승했던 현장시의 흔적을 보이는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와 같은 시에서 시인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올라간다.
ꡒ우리는 말여 옛적부텀/만백성 뱃속 채워주고/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고/논두렁은 비뚤어졌어도/농사는 빤듯이 짓는/전라도 농군들이랑게/고부 들판에 농군들이여/(…)/다 우리들 덕에 이만큼이라도/모다덜 사는지 알아야 혀/아뭇소리 안허고 있응게 다 죽은 줄 알지만 말여/아직도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땅을 파는/농군이여/농군.ꡓ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의 수량이 갈수록 주는 것처럼 진메마을의 인구도 감소일로에 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버린 마을엔 노인들만 남아 생의 저물녘을 지키고 있다. 20여 가호가 사는 마을엔 서너채가 빈집으로 버려져 있고,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만도 여덟에 이른다. 시인의 기억에 따르면 70년대 중반부터 이농 물결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그가 처음 부임했던 70년대 초 덕치초등학교의 학생 수는 7백명까지 이르렀는데, 지금은 불과 53명의 학생이 교사 6명과 함께 생활하는 미니 학교로 바뀌었다. 2학년 8명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은 20년 저쪽의 일들이 ꡒ마치 까마득한 옛날 같다ꡓ고 말했다.
사람들은 떠나고 물은 줄었어도 마을 앞 강에는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여름이면 별을 보며 잠을 청하곤 했던 벼락바위에는 말리려고 널어놓은 흰 호박 쪼가리들이 얹혀져 있고, 각각 쏘가리와 다슬기가 많이 잡힌다고 해서 이름붙은 쏘가리방죽과 다슬기방죽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강물에는 돌고기, 납자루, 쉬리, 꺽지, 피라미, 버들치, 모래무지, 자가사리 따위의 민물고기들이 추억처럼 오고 또 간다.
그러나 자연적 아름다움과 효용을 겸하고 있던 마을 앞 징검다리는 경운기 한 대가 다닐 만한 넓이의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징검돌이 치워지고 시멘트가 퍼부어지던 무렵 시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극도로 야위는 통에 두달 가량 고향 마을을 찾지 못하다가 상황이 끝난 뒤에야 와서 보고는 ꡒ너무도 괴로웠다.ꡓ 그러고 보면 의사들이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인의 병은 어쩌면 섬진강의 병이 아니었을까.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저 유마거사의 경지에 시인이 이른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인은 섬진강과 진메마을을 믿고 사랑한다. 풀이 자라고 꽃이 피었다 지고, 같은 자리에서도 해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고, 잎이 출무성했다가는 어느 순간 속절없이 져버린 뒤 흰눈이 내려 덮이고…. 1년 사시사철 하루하루가 매번 다르기 때문에 세월가는 줄 모른다. 신선놀음이 따로 있을 것인가. 예가 바로 천국인 것을.
ꡒ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고갯짓을 바라보며/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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